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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완동(舊完洞) 완전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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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6회 작성일 24-05-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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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완동(舊完洞) 완전 산신제


(1) 조사지 개관

구완동은 보문산 남쪽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보문산 준령을 중심으로 동구의 이사동, 소호동과 구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무수동, 북쪽은 보문 산을 경계로 호동과 인접하고 있다.


이 북쪽은 무수동 사이에 놓인 마을로 예부터 피난처로 잘 알려진 곳이다. 왜구의 침범에도 여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안전하였다 하여 완전이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완전 남쪽 소호리에 있는 산골에서도 신완전이라 하여 이 마을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완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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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소속된 지역으로 고려와 조선조에는 공주 목에 편입되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구완전이라 하여 회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고,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면서 대덕군 산내면 구완리가 되었다. 1935년 10월 1일 부제 신설로 회덕군이 대전부와 대덕군으로 분리되면서 대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어 구완리라 하였다. 그 후 1989년 1월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중구 구완동이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서동이다.


구완동의 자연마을은 구완전(舊完田, 구완동(舊完洞), 완전, 망탯골, 새텃말, 어청골 등이 있다.


구완전은 구완동 지역의 완전과 어청골의 마을들을 일컫는다. 구완전에서 이사동으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물방앗 골이라고 부른다. 그 골짜기에 물레방아와 성황당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완전은 무수리에서 동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북쪽으로 큰 골짜기(완전골)가 있는데, 여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완전한 피난처라 하여 옛날부터 부르게 된 것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망탯골은 보뭇골 옆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형의 생김새가 망태와 같다 하여 그 구조물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새텃말은 망탯골 옆에 위치한 마을이다. 새로운 터에 자리를 잡았다 하여 새텃말이라 한다. 공간의 위치에 따른 이름으로 새말, 새터 등은 상당히 보편화된 지명이다. 어청골은 완전 동쪽편 어청골에 있는 마을이다. 여러 선비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며 수도하던 곳이라 마을이(淸新)하다고 하여 어청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 말기에는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이 거주하여 여러 마을의 선비들에게 강학하였다고 한다.


(2) 제의 실태


① 완전 산신제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바위 밑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완전 산신제는 여자가 제관을 맡고 있어 주목된다.


산신제는 보문산 줄기의 하나인 뒷산 뒷골 중턱에 있는 바위 밑에서 지낸다. 바위 왼편 아래에는 산 제샘이 있는데, 이를 ‘용왕샘’이라고 부른다. 이 샘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고 산제 지낼 때만 사용하므로, 평상시에는 낙엽이 쌓인 채로 있으며, 사용하기 전에 미리 물을 품는다. 산제를 지내는 곳은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우묵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므로, 평상시에는 낙엽이 쌓인 채로 있으며, 사용하기 전에 미리 물을 품는다, 산제를 지내는 곳은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우묵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므로 바람이 불어도 이곳에는 바람 한 점 없다. 이 산 제당에서 개인적으로 용왕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이곳 주민들은 물이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용왕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산 제당이 있는 곳은 성소(聖所)이므로, 매사냥을 나갔다가도 꿩이 산신당 골자기로 들어가면 꿩 잡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돌아왔으며, 지금도 출입을 꺼린다. 이곳에 모셔진 산신은 어찌나 기운이 센지 이 마을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 신수를 보면 점괘에 동네 산신님부터 나온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제보자는 “산신당에 올라가면 마음이 엄섬(엄숙)해요. 마음이...”라고 산 제당이 엄숙함을 여러 번 강조한다.


제장에는 전년도에 깔았던 짚이 그대로 있고, 금줄도 나무에 매달린 채 땅에 길게 늘어져 있다. 오래된 사기 그릇 하나가 바위 밑에 엎어져 있다. 산 제당 아래에는 8.15 광복 무렵에 한학을 공부하던 사람의 오두막집의 흔적이 축대처럼 남아있다.


바위틈에는 산제 지내고 난 뒤에 제기를 깨끗이 씻어서 엎어두었으나 도난당하였다. 이 그릇은 조상대대로 사용해온 것으로, 사기제품이었다고 한다. 새로 구입한 제기는 제관집에서 보관하고 있다.


제관은 통장이 부녀회와 상의하여 정하는데, 나이가 50세이상 된 여자 중에 평상시 생활태도가 정갈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그렇지만 근래에는 한 사람이 여러 해를 맡아 지내고 있다. 제는 반드시 남녀가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부부가 하거나, 남편이 없는 사람은 아들과 같이 한다. 남자는 보조 역할을 한다. 이렇게 여자를 제관으로 삼는 것은 산신을 ‘산신할머니’라 부르듯이 산신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즉 여자 산신은 여자가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제관은 정월 아흐렛날부터 일정한 금기를 지킨다. 하루에 한번씩 목욕재계를 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술을 빚어둔다. 그런 후 바깥출입을 삼가고 집안에서 근신한다. 이날부터 주민들도 부정한 것을 보지 않고 여러 가지 금기를 지킨다.


열 나흗날이 되면 제관은 대문에 금줄을 치고, 대문 양쪽에 각기 세 무더기씩 모두 여섯 무더기의 황토를 편다. 왼새끼를 꼬아 흰 종이를 끼운 금줄을 치면 마을 사람들은 제관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금줄 치는 기간이 너무 길면 제관이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불편하기 때문에 당일에 금줄을 치는 것이다. 제관집의 남자도 당일만은 담배를 끊어야 하며, 이런 것들은 모두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금기를 모두 지키며 제를 지낼 사람이 점차 없어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당일 낮에 산제당과 샘도 청소를 하고 금줄을 친다. 샘을 치우고 난 뒤 물이 고이면 그 물로 목욕재계를 한다. 산제를 지내기 전에 부정한 것을 보거나 일이 생기면 제일을 변경한다. 작년 정초에 외부에서 들어온 상여가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일이 생겨 제일을 음력 삼월 열 사흗날로 미루어 지냈다.


산신제 지낼 비용은 예전에는 집집마다 쌀 한 말씩 거두어서 마련했다. 보름날 풍물치고 걸립을 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은지 몇 년 된다. 지금은 마을 공동기금에서 제비를 충당한다. 1997년에는 쌀 일곱 말 값인 십만 오천원으로 예산을 세워놓았다. 매년 호당 만원씩 동계 날 거두어서 마을 공동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시월 그믐날 마을 통장집에서 동계를 연다. 쌀 일곱 말에서 산신제 지낼 돈으로 쌀 다섯 말 값인 칠만 오천원을 남겨두고, 나머지 두 말 값으로 동계 때에 술, 고기, 반찬을 사고 육개장을 끓여 점심을 먹는다. 시장에 가서 명태, 누룩, 소지종이, 초, 미역, 김, 곶감, 대추, 밤 등을 사서 산신제 지낼 준비를 하고, 여기에 떡(세 되 흡 분량), 밥, 탕, 나물을 추가로 마련한다. 술은 쌀 한 말을 하여 산신제와 동네 사람들 음복하는데 사용한다.


열 나흗날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제관 부부가 산 제당으로 올라가서 어두워지면 제를 지낸다. 분향하고 술을 올리고 소지를 올리며, 독축을 하지 않는다. 소지는 먼저 만동소지를 올리고, 통장과 부녀회장의 소지를 올리고, 독축은 하지 않는다. 소지는 먼저 만동소지를 올리고 나서 호주 소지를 올린다. 옆에서 남자가 호주의 이름을 불러준다. 소지를 올릴 때 축원을 하는데, 일정한 격식이 없고 제주에 따라 달 라 지게 된다. 대개 마을의 안과태평과 복을 비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상주라거나 임신을 하여 정갈하지 않는 집이 있다면 그 집의 소지는 올리지 않는다. 소지를 다 올리고 나면 샘에도 만수향과 촛불을 켜놓고 약주 한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산제를 지낸 이튿날 제관 집에 모여서 음복을 한다.


개인적으로 산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마을에서 이용하는 산 제당에서 올리지 못하고 그 아래에서 지낸다.


<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59~60./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pp.475~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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