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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동(沙亭洞) 윗사정 거리제, 원사정 목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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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74회 작성일 24-05-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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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동(沙亭洞) 윗사정 거리제, 원사정 목신제


(1) 조사지 개관


사정동은 보문산을 경계로 동쪽에는 무수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안영동과 서구의 복수동과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문화2동과 산성동에 접하고, 남쪽으로 침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보문산 기숡 서쪽에 자리잡은 동이다.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마을이 사징이, 반송, 죽촌 등이었는데, 고종 32년(1895) 회덕군 유천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유천면 사정리에 통합되었다. 그 뒤 대전부의 설치로 대덕군 유천면 사정리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사정동으로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 사정동이 되었다가 198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정동은 안영동, 복수동과 함께 복수동으로 분리 되서 승격으로 중구 사정동이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성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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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동의 자연마을은 금텃골, 미역바우, 백골, 반송, 사정, 사징이, 사징게, 상당, 아랫백골, 안백골, 웃백골, 웃사정(웃사징이), 원사징이, 장텃굴, 죽촌, 찬샘골, 행평(송평) 등이 있다.


금텃골은 탑골 서쪽 옆 백골에 속한 마을이다. 뒷 고개는 사징계에서 길 동쪽 위로 붙은 마을이다.


미역 바우는 멱 바우라고도 부르는데, 미역 바우 부근의 마을로서 북쪽의 뗏집거리 남쪽 아래로 형성 되었던 마을이다. 큰 바위가 엉켜져 잇는데, 이를 떡 바우라고 부르던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다. 백골(栢谷)은 백골 저수지에서 서쪽으로 난 아랫길의 북쪽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백호 윤휴가 살았었는데, 그 윤휴의 호와 관련되어 생겨난 마을이라고 한다. 반송은 있었으며, 샘과 들이 있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사정은 백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큰 반송이 서 있으며 모래수렁이 있었던 마을이라 사정이라고 부른다. 사징이는 백골저수지 남쪽으로 바로 이어진 길 동쪽 편으로 붙은 마을과 그 남쪽의 죽촌과 행평을 통틀어 일컫는다. 사징게는 법무부 갱생보호소 북쪽의 산성교 바로 건너 백골로 올라가는 길에서 북쪽 산 밑의 여러 마을 중 첫 마을을 이른다. 상당은 분톳 골에서 서북쪽으로 붙은 마을이다. 탕 골의 위쪽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가옥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아랫 백곡은 백곡에서 뒷고개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백골보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웃 사정은 웃 사징이라고도 하는데, 백골저수지에서 남족으로 보문산 순환도로와 산성교에서 백골저수지로 오는 길에 만나는 사정공원 부근의 마을이다. 원사징이는 백골저수지 남쪽으로 바로 이어진 길 동쪽편에 붙은 마을로 웃사징이 아래에 있다. 백골저수지 남쪽의 마을은 죽촌이나 행평의 다른 사징이 마을이 생기기 전에 원래부터 있던 마을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 사기점(沙器店)이 있어 사정(沙亭)이라 하기도 하고, 또 모래논 수령이 있어 사정(沙汀)이라고도 한다. 장텃굴은 제2사정교와 상당 사이에 있는 마을로 장텃골, 장대라고도 부른다. 옛날에는 장이 섰던 자리였다고 한다. 죽촌(竹村)은 대나무골이 숲이 있었다고 하여 죽촌이라 한다. 찬샘골은 죽촌 남쪽 길건너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이다.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고 하여 찬샘골이라 부른다. 행평은 송평이라고도 하는데, 찬샘골에서 솔고개로 가는 길건너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2) 제의 실태


① 사정동 윗사정 거리제


과거에는 윗사정 전체 마을이 합심하여 장승에서 거리제를 지냈으나, 근래에는 원사정. 죽촌. 행평마을 사람만이 참가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그나마 행평 마을 사람들이 동물원 건립으로 모두 이주하여 지금은 원사정과 죽촌 마을만이 제에 참여한다.


제는 마을 입구 논 앞에 있는 두 기의 장승 앞에서 지낸다. 그곳에는 본래 돌을 올려 쌓은 돌탑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도로를 확장하면서 탑이 소실되어 그 자리에 장승을 세우고 위하였다. 당시 장승을 세우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는 찬반양론으로 대립했었는데, 수구막이로 장승을 세우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장승을 세우게 되었다. 장승이 있으면 다소 마음의 위안도 되고 장승제를 지내는 계기로 동네 사람들이 하루라도 모여 술 나누며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기회가 되면 좋지 않겠느냐 라는 의견이 모아져서 장승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장승은 나무장승이며, 1990년에 밤나무를 베어다가 마을의 목수가 만들었다. 남. 여 장승 두 기가 나란히 서 있으며, 남장승의 왼쪽에 여 장승이 서 있다. 장승의 형태는 충청도와 대전시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달리 흔히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몸체에 ‘천하대장군’이란 명문을 써 두었다. 여장승은 족두리를 썼으나 떨어지고 족두리를 끼웠던 철심만이 빼죽이 나와 있다. 몸체에는 ‘지하여군’이라고 쓰여왔다. 두 장승 앞에는 장방형의 제단을 시멘트로 만들어 놓았다.


거리제를 앞두고 약 한달 전인 음력 섣달 보름 경에 만동계를 열어서 제관 한 명을 뽑는다. 동네에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정하였다. 만동계에서는 거리제 유사를 뽑고 일년 동안의 마을 행사에 대한 결과 보고를 하며 당해의 일에 대한 안건을 의결한다. 제관은 일주일간 치성을 드렸으며 제를 지내기 일주일 전에 대문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거리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이전에는 집집마다 형편대로 쌀을 한 되나 두 되를 걷었다. 그러다가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번거롭다 하여 걸립을 하여 공동기금을 마련하였고, 그 기금으로 이자를 놓아 불렸다. 제비는 이 기금의 일부를 꺾어 충당하며, 1996년까지는 해마다 15만원을 쓰다가 1997년부터는 10만원으로 줄였다.


정월 초와 보름에 가가호호를 돌면서 지신밟기를 해준다. 상위에 불밝이쌀을 올리고 그 위에 촛불을 밝히고 마루에서 성주굿을 올리고 부엌과 장독대를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였다. 상에는 돈을 놓거나 쌀을 놓는다. 부엌에서는 솥뚜껑을 열어 놓고 축원을 하고 장독대에서는 장독 뚜껑을 열고 덕담을 하였다. 다시 마당에서 한번 신명나게 풍물을 치다가 술 한잔 먹고는 다른 집으로 간다. 지신밟기는 해마다 하고는 있으나 신명이 점차 줄고 있다고 한다.


제물은 제관의 집에서 장만한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떡(세 되 세 흡 분량), 포, 명태, 밥, 탕국 등을 장만하고, 김과 간장을 덧붙여 쓴다. 예전에는 술을 담았으나 근래에는 사서 쓴다.


예전에는 거리제를 지내는 날 오전에 마을 공동우물에서 샘제를 지냈다. 지금은 샘에다 파이프를 깊이 박아 펌프를 이용한 수돗물을 사용하고 있지만, 동네 모두가 이 샘을 이용하였다. 이 샘은 동네가 생기면서 만든 것으로 몇 백 년을 되었다고 한다. 마을 동민이 모두 모여 나와서 정갈하게 샘을 품었다. 샘을 품는 동안 한쪽에서는 풍장을 쳤다. 샘을 다 품고 나면 샘 입구 양 가장자리에 황토를 피고 금줄을 쳐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


이렇게 정갈하게 품어낸 샘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는 여자가 주동이 되어 행한다. 남자들은 샘 바깥에서 풍장을 쳐준다. 메 한 그릇과 세 가지 나물, 미역 한 올을 제물 삼아 지낸다. 미역을 세 번 뜯어서 샘에 뿌리고, 절을 하고 소지도 올렸다. 지금도 용왕제는 개인적으로 지내기도 한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진 여덟시 경이 되면 풍물패와 함께 제관 일행이 장승을 향하여 거리제를 지내러 간다. 풍물패는 마을회관에 모여서 준비하다가 제관 일행이 줄발하면 같이 간다. 그러나 행평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잘 쳤는데 그들이 이주하고 나자 풍물을 칠 사람이 없어 그 후로는 치지 않고 있다. 풍물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마을 아주머니들이 농협에서 주최하는 풍물강습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으며, 1997년에 40만원을 들여 풍물을 새로 장만하였다.


장승 앞에 도착하면 준비해 간 제물을 제단에 진설하고 제를 지낸다. 제는 분향하고 잔을 올리고 독축을 하고 소지를 올리고 술 한 잔을 더 올려 재배를 하고 끝낸다. 축관은 주로 지영환 씨가 맡아서 했는데, 돌아가셔서 지금은 축관을 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생략한다. 소지는 동네 전체를 위한 만동소지를 먼저 올리고 가가호호마다 한 장씩 올려 준다.


축문은 제를 지내게 될 때 지어서 사용했으며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승지신, 우리 마을이 풍요롭고, 시화연풍하며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되고, 자손들이 무사하고 평안하며 모든 액이 없게 해 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제가 끝나면 유사집에서 음복을 하고 헤어진다. 예전에는 음식을 먹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별로 없다.


② 원사정 목신제


윗사정 마을중 원사정 사람들만이 은행나무에서 목신제를 지낸다. 이 은행나무는 원사정 마을의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다. 나무 앞에 있는 안내문에는 수령이 300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마을 사람들은 400년은 족히 되었다고 믿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 마을에 남양 방씨가 처음 들어와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남양 방씨는 지금 13대째 살고 있다. 은행나무의 속이 비었기에 더 이상 자라지는 못하며 영양공급을 위해 링거 주사를 맞히기도 했다고 한다.


제관은 원사정의 반계(반회)를 통해서 뽑으며, 그 사람은 위사정의 거리제와 마찬가지로 근신하는 생활을 한다.


원사정에서는 일 년에 호당 만원씩을 걷어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목신제 기금은 이 마을기금에서 마련하고 제비는 5만원을 쓴다. 제물은 거리제와 마찬가지로, 떡, 삼색실과, 포 등을 마련한다.


제를 지내는 시간은 날이 어두 어진 일곱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 지낸다. 은행나무 앞에 제물을 진실하며, 제를 지내는 순서는 거리제와 동일하나 축은 마련해 두고 해마다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다르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신제가 끝나면 마을 앞 작은 못 옆에 있는 버드나무에도 술 한잔 올렸다. 이 나무는 52~53년 정도 된 수양버들로 옆에 작은 못이 있는데, 아이들이 빠질 위험이 있어서 잔을 올린다고 한다.


(3) 그 밖의 현황


윗 사정의 장승이 서 있는 맞은 편 얕은 고개인 참 새골에 서낭당이 있다. 지금처럼 산성동에서 침산동 쪽으로 넘어가는 신작로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이 고개가 침산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고개 위에 벚나무가 있고 그 곳에 돌무더기가 있었다. 서낭제를 지내면 자손들이 잘 된다고 하여 이 마을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의 부인들이 정월 초에서 개인적으로 서낭제를 지냈다고 한다. 주로 정월 열 나흗날에 많이 지냈다고 한다.


서낭당에는 울긋불긋하게 오색 헝겊이 걸려 있고, 나무에는 금줄이 돌러 쳐 있었는데, 예전에는 짚신을 금줄에 매달거나 돌 위에 두기도 했다고 한다. 서낭제를 지낼 때 제물로 떡과 과일을 올리기도 했으며 동전을 던져 놓기도 했다. 지금도 위하는 사람이 조금 있기는 하나 예전처럼 많이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언제인가 골동품 상인들이 서낭당에서 돈을 찾으려고 돌을 다 헐어 버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지금은 볼품이 없다.


<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51~54./대전광역시 중구, 1998. pp.934~938./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517~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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