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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전설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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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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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7회 작성일 24-05-0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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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민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는 보문산은 다음과 같은 전설들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첫째 전설로는 우화형인데, 옛날 지금의 보문산 기슭에 아들 오형제를 둔 한 농부가 살았다.

장성한 아들은 각각 자기 뜻대로 직업을 달리하여 분가를 하게 되자, 늙어 노인이 되도록 혼자 살게 되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뭄이 들어 연못에 한 방울의 물이 없도록 마르자, 그곳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 농부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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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두꺼비에게 물을 떠다 주었더니 두꺼비는 물을 마신 뒤에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다음 해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연못에 나가보니 작년의 그 두꺼비가 접시를 가지고 와서 농부 앞에 놓고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 그 접시에 담뱃재를 떨었는데 다음에 보니 접시에 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상한 조화라고 생각한 농부는 동전을 놓아 보았다.

이튿날 보니 동전이 또 한 가득차 있었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아들들이 다투어 돌아와 접시에 탐을 내게 되었다.

아들들의 욕심과 시기를 염려한 농부는 그 접시를 몰래 뒷산에다 묻고 돌아오다가 숨이 차 죽고 말았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접시를 찾았으나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물이 묻혔다하여 보물산, 다시 변하여 보문산이라 하였다.” (최문휘, 한밭의 얼,262∼164쪽 참조)


“둘째 전설은 효자형 전설인데, 옛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착한 나무꾼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이웃 마을까지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나무꾼에게는 술만 먹고 주정을 일삼는 형이 하나 있어 부모와 동생을 몹시 괴롭혔다.

어느날 나무꾼은 나무를 한짐 해가지고 내려오는 길에 조그마한 옹달샘 옆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샘 옆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무꾼은 재빨리 물고기를 샘물 속에 넣어 주었다.

물고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듯 까불까불거리면서 사라졌다. 조금 후에 눈을 돌려보니 물고기가 놓여 있던 곳에 하나의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주머니를 집어보니 그곳에 '은혜를 갚는 주머니'라고 적혀 있었다.

신기해서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 동전 하나를 넣었더니, 순식간에 주머니에 동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꾼은 큰 부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형이 그 보물주머니를 빼앗을 욕심으로 동생에게 주머니를 한번만 보여달라고 했다.

착한 동생이 주머니를 형에게 보여주자 형은 주머니를 가지고 도망치려고 했다. 동생이 알아차리고 형을 쫓아 주머니를 도로 찾으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형이 주머니를 발로 짓밟는 통에 그 주머니 안에 흙이 들어갔다. 그러자 주머니에 흙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쏟아져 나와 쌓이고 쌓이게 되었다.

이렇게 쌓인 흙이 드디어 큰 산을 이루니, 그 산 속에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다 하여 보물산이라 하였고, 그후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大田市史 682∼683쪽 참조)


“셋째로는 도승형 전설인데, 옛날 한 대사가 소제동 방죽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었는데 갑자기 논두렁에서 ‘우리 백성이 3년 가뭄으로 다 죽겠으니 우리 성을 살려주시오'하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알아보니 용궁의 왕이었다.

이에 대사는 물고기를 모아 가뭄으로부터 구해줬다.

그러자 용궁의 왕이 그 은혜로 복조리 하나를 대사에게 주었다. 대사는 복조리를 망태에 다 간직하고 보문산 근처에까지 오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 불빛이 나는 집을 찾아가니, 단칸방에 일곱 자식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었다.

부인이 대사의 저녁으로 진수성찬을 차렸으나 아이들에게는 시래기죽을 주었다.

부인의 간청으로 저녁을 먹고 아랫목에서 하룻밤을 잘 지낸 대사는 이튿날 아침 부인에게 복조리를 건네주었다.

부인이 복조리에 쌀과 엽전을 넣었더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쌀과 돈이 나왔다.

그리하여 큰 부자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이 복조리의 신통함을 알게 된 자식들이 그 복조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하였다. 부인은 복조리를 강변 모래에 묻었다. 그 때 목조리에 모래가 들어가자 다시 모래가 쏟아져 나와 점점 늘어가더니 큰 산을 이루었다.


그래서 이 산은 보물산, 곧 보문산이라고 하게 되었다.”

<大田市史,683∼68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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