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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 지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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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0회 작성일 24-05-0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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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장암(藏菴)이다. 1911년 3월 8일에 대전시 중구 선화동 69번지에서 부친 설운 지영식과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에서 평생을 거주하다가 1981년 1월 1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지헌영은 1926년 대전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1년 대전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뒤 항일학생 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음해 2월에 피체되었다.
투옥된 뒤 여러 달만에 석방되자 굴욕적인 일제하의 학교에서 얻는 지식만이 배움이 아니라는 신념 아래 연희전문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에 은신하며 선배학자와의 교류를 통하여 스스로 학문의 길을 닦으며 방랑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자 교육계에 몸을 담아 1945년 10월 모교의 교유를 거쳐 1949년 10월에는 전주 명륜대학 교수로 학계와 인연을 맺었고, 6·25전쟁 후 대전에 충남대학교가 설립되자 1952년 6월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전임되어 이 고장 대학발전에 주력하여 교육과 연구생화에 전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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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대학교육에 전념하는 것보다 광복과 전쟁의 혼탁과 세태 속에서 낙후된 언론의 중흥이 더 시급한 과제였던지 1957년 7월 충남대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언론인으로서 정론(正論)을 펴는 한편, 이 고장 문화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중도일보·대전일보의 논설위원을 거쳐 1961년 4월에 대전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전공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학계와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충남대학교와 대전대학 등에 강사로 출강하여 학계와의 유대를 유지하며 꾸준히 연구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당시만해도 공동학문활동이나 그 발표기관이 불모지나 다름없는 때에 그 기반을 닦기 위하여 어문연구회와 한국언어문학회를 창립하는데 산파역을 담당하였고, 1964년에는 어문연구회 회장, 1965년에는 한국 언어문학회 회장에 피선되어 개척적인 업적을 남겼다.

1970년대 후반 병고에 시달린 기간을 제외하면 꾸준히 논문을 발표하여 국문학자로서의 길을 걸었고, 국문학 분야 뿐만 아니라 보조과학 분야인 국어학·민속학·지리학 등도 널리 섭렵하여 학문의 폭을 넓혀 갔다.

그리하여 『향가여요신석(鄕歌麗謠新釋)』등 2편의 저서와 20여편의 주요 논문을 발표하였다. 장암 지헌영은 1981년 1월 1일에 노환으로 별세하였으며, 묘소는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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