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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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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00회 작성일 24-05-0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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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충주(忠州), 병조참판 박제함(朴悌緘)의 18대 종손으로 1889년 대전 중구 침산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서당에서 학문을 익혔고, 깨끗한 선비 후예로 성장하였다. 나이 21세가 되던 해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뼈아픈 실의에 젖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삼괴리(현재 삼괴동)의 김직원(金直源)과 같이 나라 잃은 서러움에 한탄하며 나날을 보내다가 한때는 외국으로 망명할 계획도 해보았으나, 박씨 가문의 18대 종손이요 편모슬하에 외아들로 대를 이을 자식도 아직 두지 못한 때문에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의 간곡한 만류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 일본의 학정이 갈수록 심해져 마침내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전개된다.

1919년 3월, 전국에서는 고종의 국장을 앞두고 민심이 들끓고 있을 때,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발표하고, 이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죽어간 동포가 수없이 늘어나고 나날이 격렬한 시위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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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대전지역에서 박종병과 김직원이 거사할 것을 약속하고 인동시장에서 어물상을 경영하는 김창규를 찾아가 거사의 뜻을 설명하고 뜻있는 동지 윤명화 외 수명을 규합하여 협의 끝에 4월 1일 대전장날을 기해 대전지방이 일제히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후, 삼괴리의 김직원 집에 연락본부를 두고 행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입수된 독립선언서를 수백매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든 다음 3월 20일경 김직원의 당질인 김성철을 시켜 등사한 독립선언서 300매를 인동시장 김창규의 집에 전달하고 4월 1일의 거사를 위한 모든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3월27일경 시장에서 윤명화가 독립선언서 한 장을 가지고 동지의 집에 들어갈 때 부근에 사는 일본인이 미행하는 것을 윤명화가 알아차리고 즉시 김창규를 찾아가 미행당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인동시장에서 만이라도 거사를 앞당겨 하자는 상의 끝에 즉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시장에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강제 진압하고 김창규·윤명화등 여러명이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박종병·김직원은 당황하여 김정철을 피신시키고 거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양승환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 거사는 계획했던대로 실행하기도 하고 유천면(현재 유천동), 동면(현재 추동부근) 등지로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전달하였다.


마침내 4월 1일 맞이하여 지역에서 태극기를 감추고 장보러 가는 것을 가장하여 이날 정오 즈음 대전시장에 수백군중이 집결하였다.

이에 박종병·김직원· 두사람은 군중 앞에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수백 군중이 따라서 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누비니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칼로 시위군중을 마구 찌르자 시위군중도 이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날이 장날이라 장을 보러 온 군중들도 합세하여 수천 군중이 되었고, 이에 경찰(순사)들로서 진압이 어렵게 되자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박병권·정대귀·방춘실 외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임동빈 외 수십명은 부상을 당하였으며, 양승환은 일본순사의 칼에 배를 찔려 배를 움켜쥐고 만세를 외치다가 죽어갔다.


이날 박종병·김직원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19년 4월 18일 공부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죄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라 잃은 백성이 나라를 찾기위해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무슨 죄가 되냐며 판결에 불복,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여 법정투쟁 끝에 5월 10일 징역 10월로 감형되었으나 또 다시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상소했다가 기각당하였다.


그리하여 공주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에 출옥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날로부터 출옥때까지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깊은 상처와 골병이 들었고, 출옥한 후에도 일본 경찰들이 가해오는 압박으로 견디기 어려워, 1921년 동지들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있는 동지들과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1945년 8·15광복을 맞아 독립은 되었으나, 반평생 독립운동으로 인한 고초로 병고에 시달리며 가난 속에 살다가 1971년 9월 11일 타계하여 침산동 선영 방화봉에 안장되었다.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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