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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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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2회 작성일 24-05-08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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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심향(深香)이다. 1893년 8월 26일(음력) 지금의 서울 효자동인 잣골에서 승지(承旨) 박경양(朴慶陽)과 청풍(淸風)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대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7년 6·25전쟁의 피난지였던 목포를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에서 하차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당시 한일은행 지점장의 권유로 대전에 머물게 되었고, 1980년 7월 87세로 하직할 때까지 줄곧 이 고장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대전지역의 미술문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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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8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5년에는 창명학교를 졸업하고 YMCA 문학부에 진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9년에는 YMCA 문학부를 수료하고 미국 유학을 위해 YMCA 영어반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때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던 김창환(金昌煥)의 영향으로 묵화를 시작하였다.

부친은 아들이 화가의 길을 걷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알고는 평소 친분이 있던 조석진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의 지도를 받도록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그를 입학시켜 주었다.


이때가 20세이던 1913년으로, 이 서화미술회에서 조석진으로부터 전통적인 화법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3년 과정을 수료한 뒤에도 계속 소림의 문하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후 자신이 미술세계의 기반이랄 수 잇는 중국문화를 보다 가까이 접하고 전통화법을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1917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3년간 머물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미술세계와 접하게 되고 전통화단의 동향도 살펴보았다.


또한 상해에 체류하면서 김홍식(金弘植)·여운형(呂運亨)·이윤용(李允用) 등 임시정부 사람들과 사귐으로써 임시정부 일본 경찰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3년간의 상해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 것도 사실은 자발적인 귀국이 아니라 일본 경찰에 의한 압송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9년 일본의 시모노세끼를 경유하여 귀국하던 중 부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상해에서 독립지사들과 접촉에 대하여 추궁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부가 낙향해 있던 충북의 옥천으로 주거제한된 상태로 풀려나 그후 2년간 옥천경찰서의 감시와 연금 속에서 살기도 하였다. 1922년 주거제한이 풀리자 서울로 올라와 제2회 협전(協展) 회원으로 참가한 바 있고, 1923년에는 일본 경찰의 위협으로 총독부에서 주최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흐린 달밤>이라는 산수화를 출품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울에 올라온 후 작품을 출품하면서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1923년에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간도지방의 용정과 연길에서 3년여간 머물면서 한인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5년 다시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그동안 중단하였던 그림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1926년에는 일제의 주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참가하여 산수화 <유곡(幽谷)의 가을>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한 바 있다.


그리고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제6·7·8·9·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1931년의 제11회 협전에도 출품하였다.


이와 같이 박승무는 한동안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1932년에는 이 전람회의 내막에 환멸을 느꼈고, 또한 더 이상 총독부의 시책을 따르지 않을 것을 작정하고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의 야인작가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박승무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지사들과 접촉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어 종로경찰서의 감시를 받아 왔다.


이에 1944년 서울을 떠나 가평의 송씨 댁에서 피신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나날을 지내던 그는 1945년 서울로 올라가던 길가에서 신문기사를 통하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해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된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광복 이후 미술전에 중앙 화단에서 물러나 은둔적 생활을 즐기면서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박승무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가던 중 전주를 거쳐 목포를 정착하여 생활을 하다가, 1957년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목포를 떠나게 되었고, 당시에는 기차가 서울에 직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에서 짐을 부치고 서울로 갈 기회를 엿보던 중 목포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일은행 지점장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한일은행 지점장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고장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8년 서울 원서동의 집을 처분하고 대전에 집을 마련하여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65세로, 박승무의 만년은 이곳(대전시 대흥3동 49-25번지)을 생활 근거지로하여 1980년 7월 87세로 자택에서 별세 할 때까지 대전을 중심으로 하여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야인작가로서의 작품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심향 박승무화백 숭모비(深香 朴勝武畵伯 崇慕碑)는 산내 목단리의 유택(幽宅)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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