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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 민태식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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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0회 작성일 24-05-08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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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유성구 도룡동)에서 부친 민영선(閔泳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군일(君一)이요, 호는 동교(同橋)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성실한 성품을 타고났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글씨를 배웠으며, 송극재(宋克齋)로부터 수학하기도 하였다. 공이 어릴적 집에서 부친에게 한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부친의 지도가 각별하였다고 한다, 17세때에 공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영명학교 3년을 수료한 후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서울 배재고보를 25세에 졸업했다.

27세에 경성제국대학 중국철학과에 입학하여 31세에 졸업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해방이 되던 1945년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로 남하하여 대전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대전시 연합대학은 대전에 내려온 800여명의 대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시연합대학의 개교가 필연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민태식의 주도하에 손낙범(孫洛範), 김순동(金舜東)등과 함께 충청남도 전시 연합대학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장에는 대덕군 출신 제헌 국회의원 송진백(宋鎭百)이 담당하고, 대학내 학사행정은 본인이 맡아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학장에 취임하였다.


대학 본부는 도청 뒤에 있는 잠업취체소를 대여받아 사용하였는데, 교사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대전지방법원 안에 있는 피고인 대기실을 임한경(林漢暻) 법원장의 배려로 사용하였는데 판자로 만든 목조의자에 책상도 없이 강의를 하는 형편이었다.


시설과 환경이 도저히 강의하기에 부적당하였으므로 손영도(孫永道) 대전시장과 상의하여 대흥초등학교의 교실 한 칸을 얻어 이곳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충남도민의 숙원이던 전시 연합대학이 개교하게 되자, 전시 연합대학의 운영위원회 체제를 바로 도립 충남대학교 설립 기성회 체제로 바꾸어 진헌식(陣憲植) 충청남도 지사가 기성회장에 취임하고, 민태식을 위시해서 여러 교수들이 주동이 되어 충남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합의하고 기성회와의 합의하에 범 도민운동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때 도민들은 가마니 한잎씩을 거두어서 그 기금으로 마련하여 충남대학교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1952년 5월 25일자로 드디어 충남대학교 설립인가를 얻어낸 도립 충남대학교는 초대 총장서리로 진헌식 지사가 취임하고 문리과대학 학장서리로 전시 연합대학장이던 민태식이 취임하였다.


진헌식 총장서리가 취임 3개월 반만에 내무부장관으로 부임함에 따라 후임으로 부임해 온 성낙서(成樂緖) 지사가 총장서리로 발령되었다.


성낙서 총장서리 또한 1954년 9월 충남도지사를 사임함에 따라 총장서리도 자동 사임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2일자로 문리과대학 민태식 학장이 총장서리를 겸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5년 6월 30일 전교 법정교수회에서 민태식 학장을 총장으로 선출하고, 같은 해 8월 20일자로 총장발령을 받으니 전임총장의 취임은 이것이 처음이며 민선총장으로 취임한 것도 이것이 처음이어서 충남대학교 역사상 그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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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9월 10일 문리과대학 교정에서 민태식 초대 총장의 취임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민태식 총장은 본부중심의 대학운영보다 각 단과대학의 특성을 살리는 단과대학 중심의 대학운영을 하겠다고 피력하였다.


1954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만 5년이 넘는 총장 재임기간에 문화동에 캠퍼스를 이전하여 문리대·농대·공과대와 본부 도서관 등 종합대학교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교지확장·교사증축·대학원인가·도서관 신설·실험실 확장·실습공장 신설·2부대학(야간)신설·교수 충원·대학신문 발간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60년 7월 사임발령을 받고 8월 9일 이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충남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하자 바로 서울문리사범대학 학장으로 초빙받아 부임하였으며, 1961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전임한 후 1968년 같은 학교 유학대학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여 재직하다가 정년퇴임하였다. 이후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회장, 현정회(顯正會)고문, 사문학회(斯文學會)회장, 동양문화연구소(東洋文化硏究所)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군에 있으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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