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 버드내 두레놀이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69
제보 : 유병석, 신종헌, 유명준, 유응제 연출 : 김용근(한국전통예술진흥회 충남지부장) 자도 : 장택수 (대전시무형문화재3호)
버드나무가 많다는 것에서 유래한 버드내는 과거 유등천을 끼고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룬 논농사가 주된 생업이었던 마을이다.
지금의 행정동 동명으로 유천동이 된 중심 마을이 바로 버드내로 이를 "중평"이라 불렀으며 인근의 11개 마을(상평<유천1동>, 하평<태평동>, 천근<문화>, 과례<문화>, 용머리<용두>, 숯뱅이<용문>, 들말<변동>, 마골<농도원>, 도마다리<구 충남고>, 복수<복수>, 당디<산성동>과 함께 열두마을을 이루었다.
중평이 약 100여호에 이르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해방전에는 대부분 '소절이'라는 일인이나 흥업회사의 땅을 빌어 소작 형태의 영농을 하였다.
소작의 규모는 대부분 7-8마지기 정도이나 많게는 30마지기를 부친 사람도 있었다. 소작짓던 땅은 해방후 대부분 해당 소작인들이 15년 분할 상환조건으로 불하받았다. 이러한 소작 규모의 차이는 지주와 소작인과의 면식 정도에 따른 것이다. 당시 소출은 마지기당 3섬 정도였으며, 이 가운데 1가마 반을 소작료인 도조(賭租)로 물었다.
두레는 논 김매는 작업에만 동원된 것으로 대략 음력 6월 20일경 시작하여 7월 7석전까지는 모든 작업을 맺는다.
먼저 두레를 짜기 위해서 6월초에 총회를 열게 되는데 집집마다 1명씩 의무적으로 참가하여 불참자는 '궐(벌)'을 받는다. 중평의 두레는 인근에서 가장 커서 대략 100명 남짓하게 구성되엇다. 총회 장소는 현재 대호장 부근 침례교회 옆에 있었던 공회당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두레의 우두머리인 좌상을 선출하고 총각대방등 기타 필요한 임원을 뽑게 된다.
좌상은 딩시 구장이 담당하였으며, 총각대방은 30대의 힘있는 자가 맡는다.
또한 한 해의 직업량을 산출하여 작업일정을 정하고 풍물을 손보게 된다.
김은 모두 세번 매게 되는데 처음인 아시매기와 두번째인 이듬매기에서는 호미를 사용하며 마지막 만물은 손으로 한다.
맨손으로 김매기를 할때는 느생이집을 손가락에 끼워 작업한다. 느생이집은 밤나무에 기생하는 느생이라는 벌레집으로 고치를 말한다.
그물 모양으로 엮어진 고치 형태이기에 손가락에 끼울 수 있는 적당한 크기와 구조이다.
고치의 한쪽을 따서 그 속의 벌레를 제거하고 처마에 말려 두었다가 만물 김매기
가업 등 맨손을 사용한 작업에서 손가락 보호를 위해 끼워 쓴다.
두레 풍물패는 꽹과리 2, 북 2, 장고 2, 징 2, 소고 5-6, 꽃나비 2로 구성된다. 풍물패는 종이꽃으로 장식한 고깔을 쓰고 바지저고리에 삼색띠를 두른 차림이다.
두레기로는 농기와 영기가 있었다.
농기는 정방향의 흰광목에 먹으로 '農'자만을 크게 썼으며 깃대쪽을 제외한 세변에 검정천으로 삼각형의 서레발을 달아 치장하였다. 깃대는 매우 장대하여 인근에서 구하지 못하고 전라도 지방에서 사가지고 왔다.
깃대 꼭대기에는 꿩의 꽁지깃으로 만든 꿩작목을 꼿고 그 밑으로 칡껍질로 만든 술은 늘여뜨려 장식한다.
영기는 두개로 삼각형의 붉은 바탕 천에 '令'이란 글자를 검은 천으로 오려 박았다.
깃대는 단단한 참작나무를 사용하여 삼각형으로 깍아 만든 깃봉과 연결된 형태로 제작한다.
농기는 매우 커서 잪으로 만든 깃대받침에 받쳐 기운 센 사람이 들고 다른 세 사람이 깃대 중간을 맨 흰 광목천으로 잡아 균형을 유지한 채 이동한다.
중평 두레는 버드내 열두 두레 가운데 가장 큰 두레였기에 농기를 세워놓은 곳을 지나는 이웃의 다른 두레는 그들의 기를 숙여 예의를 표하여야 했다. 예의를 표한 두레패가 지나가면 그들에게 술대접을 하지만 만일 절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싸움이 붙는다. 당시 두레싸움이 붙어 상대편의 악기를 부수고 농기를 꺾어버려 재판까지 한 경우가 있다 한다.
물론 재판에서는 예의를 표하지 않고 지나가다 봉변을 당한 상대편이 패소하였다한다.
작업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며 일은 보다 일찍 끝나게 된다. 이른 시간부터 각자 집에서 아침을 먹고 6시 반경이 되면 논 가운데 '회당당거리'라 부르는 정자나무(버드나무)가 있는 곳으로 모인다. 성원 가운데 작업할 논이 집 가까운 곳에 있으면 버로 논으로 나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일단 회당당거리에 모인다.
일행이 모여지면 농기 영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함께 일터로 향한다.
논에 도착해서는 바로 작업에 들어가며 10시 반경에 오전 새참이 나온다.
오전 새참은 수제비나 국수 등 가루음식이 주를 이룬다. 새참 후 잠깐 쉬고 다시 일을 시작하다 12시 반경에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각자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서너 사람이 지게에 거두어다 일터에서 함께 먹게 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잠시 눈을 붙이다 2시경에 일을 시작한다.
3시 반경에 오후 새참이 나온다. 오후 새참은 모두 해당 소작인이 준비한다. 오후 새참을 들고 다시 시작한 일은 대략 5시반경에 종료한다. 한 사람당 작업량은 대개 한마지기 정도였다. 이처럼 일찍 일을 마치는 것은 각자 집에 돌아가 씻고 다음날 일을 위해 쉬려는 것이다.
두레일이 시작되면 좌상은 작업량을 기록하며, 총각대방은 꾀부리거나 일을 거칠게 하는 사람을 혼내기 위해 '호시랭이(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독려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풍물패는 논뚜렁을 돌며 연신 악기를 치고 다닌다.
일하는 사람들도 노래를 부르는데 당시 '이호준'이란 사람이 선소리를 매우 잘하며 그가 소리를 매기면 나머지가 받았다 한다.
모든 김매기 작업을 마치고 칠석날이 되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정자나무(느티나무 1, 버드나 2)에 모여 하루를 놀게 된다. 정자마누 주변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돌이 깔려 있으며 나무밑에 들돌 한 개가 놓여 있다.
들돌은 둥근 형태의 돌로 '夫土'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돌이 너무 무거워 다른 사람은 들 수가 없었고 오직 '최익성'이란 자 혼자만이 들 수 있었다 한다. 놀이라해서 별다른 것은 없었고 풍물을 치며 술을 들고 윷놀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날 일잘한 머슴들은 주인에게서 옷 한벌을 얻어 입었다.
칠석날 놀이까지 마친 다음에 결산을 본다. 대부분 모자람없이 수입지출이 맞으나 만일 남는 경우는 동금으로 남긴다.
한밭지역에 보문산을 중심으로 인근 들판에는 산이라고는 없는데 버드내 들가운데만이 유일하게도 자그마한 야산 즉 동산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어느날 어느 주민(셩명미상)에게 백발노인이 꿈에 나타나 동산에다 산제당을 짓고 산제를 정성껏 지내면 너희 동리가 평안할 것이다 하고 선몽을 하므로 그때부터 산제당을 짓고 산제를 지내왔고 지금도 그 자리에(현 유천1동) 산제당이 보존되고 있으며 버드내에서는 매년 두레가 나는데 산제부터 올리고 두레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 두레구성 >>
옛과 같이 구성하려면 중평을 비롯하여 11개 마을 별로 구성하여야 하는데 편의상 홋수가 가장 많았던 중평마을을 1개조로 하고 상평을 비롯하여 천근, 과례, 도마다리, 복수, 당디를 1개조로 하평을 비롯하여 용머리, 숯뱅이, 들판, 마골을 1개조로 하여 3개조로 구성한다.
※ 첫째마당
두레가 시작되려면 상평조와 하평조는 각 마을기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좌상마을인 중평 느티나무밑으로 집결한다.
상평패와 하평패는 중간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상호 상견례를 하고 중평느티나무 밑에서 기다리든 좌상에게 기세배를 한다.
※ 둘째마당
기세배가 끝나면 11개 마을 농군들은 산제당에 먼저 제를 지내고 농기를 세워둔 느티나무밑에 와서 좌상과 총각대방이 제관이 되어 농신제를 지낸다.
<山神祭祝文>
維歲次 丙子六月 二十日
坐上 敢昭告干
寶文山神 之位
今慈選序 送舊迎新 國泰民安
時和年豊 家家有慶 人人無故
神其保佑 碑無後艱 謹以淸酌
庶羞恭伸 克有終始 尙響
<농신제 축원문>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신께 비나이다
적기적기 비를 주셔 풍년들게 하옵시고
연년에 농사질때 낫날에 손을 비고
호미끝에 발등찍고 등짐하다 발목빼니
저희정성 받으시고 저희들을 살피시사
1년내내 다가도록 무사하게 해줍소서
※ 셋째마당
농신제가 끝나고 농군들은 재사음식을 나눠먹고 있는데 때마침 선비 한 사람이 하인을 대동하고 농기앞을 예의도 갗추지 않고 그냥 지나려고 하는 찰나에,
총각 : 여보쇼 선비님 농기앞을 지나려면 의식을 표하고 지나는 것쯤이야 선비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하인 : 이 어른이 누구신데 행패를 부리느냐?
선비 : 어허이 너는 가만히 있거라
총각 : 선비님, 속담에 하인을 잘 둬야 양반노릇을 잘한다 하였는데...
선비 : 여보쇼들 제가 잘못했소(농기에 절한다)
여러분들이 보니 이 고장에 풍년들것에 분명합니다. 수고들 하십시오.(떠난다)
총각 : (큰소리로) 양반 하나 병 신 만들었네
여러분! 술도 한잔씩 했으니 논매러 갑시다.
(풍악을 울리며 농군을 인솔하고 논으로 향한다)
※ 넷째마당(초벌매는 소리)
후렴 : 잘하고 잘하네 에헤이 산이가 잘하네
들어가세 들어가세 반달뱀이로 들어가세
초생달이 반달인데 이논뱀이도 반달일세
여보시오 농군님들 이내말을 잘들어주소
포기마다 잘살펴서 논바닥에 작은풀은
호미밥으로 덮어대고
어덕밑에 앞잡이는 빈장잡아 돌아주고
뒷잡이는 밀어주고 빈장잡아 다맸으니
장고뱀이로 건너가세 농사법은 뉘지었나
신농씨가 지었다네 한마지기 닷섬먹게
차근차근 잘매주세 앞으로는 훔쳐매고
뒤로는 걸러부치세 늦어간다 늦어간다
점심참수 늦어간다 다매간다 다매간다
장고뱀이도 다매간다 앞뒤잡이는 잡아돌려라
잦은소리 : 얼카산이야 얼카산이야
※ 다섯째마당(두벌매기소리)
후렴 : 얼널널 상사뒤여
잘 자랐네 잘 자랐네
초벌맨지 엊그젠데 중옥팔달 심었으니
우리조선 8도중에 충청도가 중심인데
충심많고 효심많고 인심많은 충청도인데
하늘인들 무심하리
마을마다 풍년주고 태평성대 분명코나
이농사를 잘지어서 조상님께 제올리고
부모님께 봉양하고 동기간에 나눠먹고
처자식을 살펴보며 태평성대 이뤄보세
다매간다 서두르자 석양천에 해가질라
다되간다 돌려부치자
잦은소리 : 얼카산이야 알카산이야
(두벌매기가 끝나면 농기밑에서 새참을 먹는다)
※ 여섯째마당
후렴 : 어헤이 저리고 잘한다
반달뱀이 들어서서 자리잘들 잡아주소
두벌맨제 엊그젠데 정갱이닫게 자랐구나
포기사이 붙은풀은 엄지손으로 뽑아내고
어덕밑에 뻗은풀은 두손으로 훔쳐주고
얼마후면 칠석이고 얼마후면 백중이니
금년농사 다지었네
잦은소리 : 다훔쳤네 다훔쳤네 잡아돌려 얼카산이로
끝을맺세 얼카산이야 알카산이야 만세
※ 일곱째마당
뒤풀이로서 충청도 전통가락인 쩍쩍이, 늦은칠채, 잦은칠채, 3채, 6채, 2채 등 각종 가락으로 흥겨운 한마당을 펼치고 두레는 끝남.
버드나무가 많다는 것에서 유래한 버드내는 과거 유등천을 끼고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룬 논농사가 주된 생업이었던 마을이다.
지금의 행정동 동명으로 유천동이 된 중심 마을이 바로 버드내로 이를 "중평"이라 불렀으며 인근의 11개 마을(상평<유천1동>, 하평<태평동>, 천근<문화>, 과례<문화>, 용머리<용두>, 숯뱅이<용문>, 들말<변동>, 마골<농도원>, 도마다리<구 충남고>, 복수<복수>, 당디<산성동>과 함께 열두마을을 이루었다.
중평이 약 100여호에 이르는 가장 큰 마을이었다.
해방전에는 대부분 '소절이'라는 일인이나 흥업회사의 땅을 빌어 소작 형태의 영농을 하였다.
소작의 규모는 대부분 7-8마지기 정도이나 많게는 30마지기를 부친 사람도 있었다. 소작짓던 땅은 해방후 대부분 해당 소작인들이 15년 분할 상환조건으로 불하받았다. 이러한 소작 규모의 차이는 지주와 소작인과의 면식 정도에 따른 것이다. 당시 소출은 마지기당 3섬 정도였으며, 이 가운데 1가마 반을 소작료인 도조(賭租)로 물었다.
두레는 논 김매는 작업에만 동원된 것으로 대략 음력 6월 20일경 시작하여 7월 7석전까지는 모든 작업을 맺는다.
먼저 두레를 짜기 위해서 6월초에 총회를 열게 되는데 집집마다 1명씩 의무적으로 참가하여 불참자는 '궐(벌)'을 받는다. 중평의 두레는 인근에서 가장 커서 대략 100명 남짓하게 구성되엇다. 총회 장소는 현재 대호장 부근 침례교회 옆에 있었던 공회당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두레의 우두머리인 좌상을 선출하고 총각대방등 기타 필요한 임원을 뽑게 된다.
좌상은 딩시 구장이 담당하였으며, 총각대방은 30대의 힘있는 자가 맡는다.
또한 한 해의 직업량을 산출하여 작업일정을 정하고 풍물을 손보게 된다.
김은 모두 세번 매게 되는데 처음인 아시매기와 두번째인 이듬매기에서는 호미를 사용하며 마지막 만물은 손으로 한다.
맨손으로 김매기를 할때는 느생이집을 손가락에 끼워 작업한다. 느생이집은 밤나무에 기생하는 느생이라는 벌레집으로 고치를 말한다.
그물 모양으로 엮어진 고치 형태이기에 손가락에 끼울 수 있는 적당한 크기와 구조이다.
고치의 한쪽을 따서 그 속의 벌레를 제거하고 처마에 말려 두었다가 만물 김매기
가업 등 맨손을 사용한 작업에서 손가락 보호를 위해 끼워 쓴다.
두레 풍물패는 꽹과리 2, 북 2, 장고 2, 징 2, 소고 5-6, 꽃나비 2로 구성된다. 풍물패는 종이꽃으로 장식한 고깔을 쓰고 바지저고리에 삼색띠를 두른 차림이다.
두레기로는 농기와 영기가 있었다.
농기는 정방향의 흰광목에 먹으로 '農'자만을 크게 썼으며 깃대쪽을 제외한 세변에 검정천으로 삼각형의 서레발을 달아 치장하였다. 깃대는 매우 장대하여 인근에서 구하지 못하고 전라도 지방에서 사가지고 왔다.
깃대 꼭대기에는 꿩의 꽁지깃으로 만든 꿩작목을 꼿고 그 밑으로 칡껍질로 만든 술은 늘여뜨려 장식한다.
영기는 두개로 삼각형의 붉은 바탕 천에 '令'이란 글자를 검은 천으로 오려 박았다.
깃대는 단단한 참작나무를 사용하여 삼각형으로 깍아 만든 깃봉과 연결된 형태로 제작한다.
농기는 매우 커서 잪으로 만든 깃대받침에 받쳐 기운 센 사람이 들고 다른 세 사람이 깃대 중간을 맨 흰 광목천으로 잡아 균형을 유지한 채 이동한다.
중평 두레는 버드내 열두 두레 가운데 가장 큰 두레였기에 농기를 세워놓은 곳을 지나는 이웃의 다른 두레는 그들의 기를 숙여 예의를 표하여야 했다. 예의를 표한 두레패가 지나가면 그들에게 술대접을 하지만 만일 절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싸움이 붙는다. 당시 두레싸움이 붙어 상대편의 악기를 부수고 농기를 꺾어버려 재판까지 한 경우가 있다 한다.
물론 재판에서는 예의를 표하지 않고 지나가다 봉변을 당한 상대편이 패소하였다한다.
작업은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며 일은 보다 일찍 끝나게 된다. 이른 시간부터 각자 집에서 아침을 먹고 6시 반경이 되면 논 가운데 '회당당거리'라 부르는 정자나무(버드나무)가 있는 곳으로 모인다. 성원 가운데 작업할 논이 집 가까운 곳에 있으면 버로 논으로 나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일단 회당당거리에 모인다.
일행이 모여지면 농기 영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함께 일터로 향한다.
논에 도착해서는 바로 작업에 들어가며 10시 반경에 오전 새참이 나온다.
오전 새참은 수제비나 국수 등 가루음식이 주를 이룬다. 새참 후 잠깐 쉬고 다시 일을 시작하다 12시 반경에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각자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서너 사람이 지게에 거두어다 일터에서 함께 먹게 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잠시 눈을 붙이다 2시경에 일을 시작한다.
3시 반경에 오후 새참이 나온다. 오후 새참은 모두 해당 소작인이 준비한다. 오후 새참을 들고 다시 시작한 일은 대략 5시반경에 종료한다. 한 사람당 작업량은 대개 한마지기 정도였다. 이처럼 일찍 일을 마치는 것은 각자 집에 돌아가 씻고 다음날 일을 위해 쉬려는 것이다.
두레일이 시작되면 좌상은 작업량을 기록하며, 총각대방은 꾀부리거나 일을 거칠게 하는 사람을 혼내기 위해 '호시랭이(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독려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풍물패는 논뚜렁을 돌며 연신 악기를 치고 다닌다.
일하는 사람들도 노래를 부르는데 당시 '이호준'이란 사람이 선소리를 매우 잘하며 그가 소리를 매기면 나머지가 받았다 한다.
모든 김매기 작업을 마치고 칠석날이 되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정자나무(느티나무 1, 버드나 2)에 모여 하루를 놀게 된다. 정자마누 주변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돌이 깔려 있으며 나무밑에 들돌 한 개가 놓여 있다.
들돌은 둥근 형태의 돌로 '夫土'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돌이 너무 무거워 다른 사람은 들 수가 없었고 오직 '최익성'이란 자 혼자만이 들 수 있었다 한다. 놀이라해서 별다른 것은 없었고 풍물을 치며 술을 들고 윷놀이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날 일잘한 머슴들은 주인에게서 옷 한벌을 얻어 입었다.
칠석날 놀이까지 마친 다음에 결산을 본다. 대부분 모자람없이 수입지출이 맞으나 만일 남는 경우는 동금으로 남긴다.
한밭지역에 보문산을 중심으로 인근 들판에는 산이라고는 없는데 버드내 들가운데만이 유일하게도 자그마한 야산 즉 동산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어느날 어느 주민(셩명미상)에게 백발노인이 꿈에 나타나 동산에다 산제당을 짓고 산제를 정성껏 지내면 너희 동리가 평안할 것이다 하고 선몽을 하므로 그때부터 산제당을 짓고 산제를 지내왔고 지금도 그 자리에(현 유천1동) 산제당이 보존되고 있으며 버드내에서는 매년 두레가 나는데 산제부터 올리고 두레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 두레구성 >>
옛과 같이 구성하려면 중평을 비롯하여 11개 마을 별로 구성하여야 하는데 편의상 홋수가 가장 많았던 중평마을을 1개조로 하고 상평을 비롯하여 천근, 과례, 도마다리, 복수, 당디를 1개조로 하평을 비롯하여 용머리, 숯뱅이, 들판, 마골을 1개조로 하여 3개조로 구성한다.
※ 첫째마당
두레가 시작되려면 상평조와 하평조는 각 마을기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좌상마을인 중평 느티나무밑으로 집결한다.
상평패와 하평패는 중간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상호 상견례를 하고 중평느티나무 밑에서 기다리든 좌상에게 기세배를 한다.
※ 둘째마당
기세배가 끝나면 11개 마을 농군들은 산제당에 먼저 제를 지내고 농기를 세워둔 느티나무밑에 와서 좌상과 총각대방이 제관이 되어 농신제를 지낸다.
<山神祭祝文>
維歲次 丙子六月 二十日
坐上 敢昭告干
寶文山神 之位
今慈選序 送舊迎新 國泰民安
時和年豊 家家有慶 人人無故
神其保佑 碑無後艱 謹以淸酌
庶羞恭伸 克有終始 尙響
<농신제 축원문>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신께 비나이다
적기적기 비를 주셔 풍년들게 하옵시고
연년에 농사질때 낫날에 손을 비고
호미끝에 발등찍고 등짐하다 발목빼니
저희정성 받으시고 저희들을 살피시사
1년내내 다가도록 무사하게 해줍소서
※ 셋째마당
농신제가 끝나고 농군들은 재사음식을 나눠먹고 있는데 때마침 선비 한 사람이 하인을 대동하고 농기앞을 예의도 갗추지 않고 그냥 지나려고 하는 찰나에,
총각 : 여보쇼 선비님 농기앞을 지나려면 의식을 표하고 지나는 것쯤이야 선비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하인 : 이 어른이 누구신데 행패를 부리느냐?
선비 : 어허이 너는 가만히 있거라
총각 : 선비님, 속담에 하인을 잘 둬야 양반노릇을 잘한다 하였는데...
선비 : 여보쇼들 제가 잘못했소(농기에 절한다)
여러분들이 보니 이 고장에 풍년들것에 분명합니다. 수고들 하십시오.(떠난다)
총각 : (큰소리로) 양반 하나 병 신 만들었네
여러분! 술도 한잔씩 했으니 논매러 갑시다.
(풍악을 울리며 농군을 인솔하고 논으로 향한다)
※ 넷째마당(초벌매는 소리)
후렴 : 잘하고 잘하네 에헤이 산이가 잘하네
들어가세 들어가세 반달뱀이로 들어가세
초생달이 반달인데 이논뱀이도 반달일세
여보시오 농군님들 이내말을 잘들어주소
포기마다 잘살펴서 논바닥에 작은풀은
호미밥으로 덮어대고
어덕밑에 앞잡이는 빈장잡아 돌아주고
뒷잡이는 밀어주고 빈장잡아 다맸으니
장고뱀이로 건너가세 농사법은 뉘지었나
신농씨가 지었다네 한마지기 닷섬먹게
차근차근 잘매주세 앞으로는 훔쳐매고
뒤로는 걸러부치세 늦어간다 늦어간다
점심참수 늦어간다 다매간다 다매간다
장고뱀이도 다매간다 앞뒤잡이는 잡아돌려라
잦은소리 : 얼카산이야 얼카산이야
※ 다섯째마당(두벌매기소리)
후렴 : 얼널널 상사뒤여
잘 자랐네 잘 자랐네
초벌맨지 엊그젠데 중옥팔달 심었으니
우리조선 8도중에 충청도가 중심인데
충심많고 효심많고 인심많은 충청도인데
하늘인들 무심하리
마을마다 풍년주고 태평성대 분명코나
이농사를 잘지어서 조상님께 제올리고
부모님께 봉양하고 동기간에 나눠먹고
처자식을 살펴보며 태평성대 이뤄보세
다매간다 서두르자 석양천에 해가질라
다되간다 돌려부치자
잦은소리 : 얼카산이야 알카산이야
(두벌매기가 끝나면 농기밑에서 새참을 먹는다)
※ 여섯째마당
후렴 : 어헤이 저리고 잘한다
반달뱀이 들어서서 자리잘들 잡아주소
두벌맨제 엊그젠데 정갱이닫게 자랐구나
포기사이 붙은풀은 엄지손으로 뽑아내고
어덕밑에 뻗은풀은 두손으로 훔쳐주고
얼마후면 칠석이고 얼마후면 백중이니
금년농사 다지었네
잦은소리 : 다훔쳤네 다훔쳤네 잡아돌려 얼카산이로
끝을맺세 얼카산이야 알카산이야 만세
※ 일곱째마당
뒤풀이로서 충청도 전통가락인 쩍쩍이, 늦은칠채, 잦은칠채, 3채, 6채, 2채 등 각종 가락으로 흥겨운 한마당을 펼치고 두레는 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