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임홍빈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53
모친 심성녀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1928년 1월 9일 출생하였다. 원적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288번지이고, 주거지는 중구 대흥3동 386-11번지이다.
부친의 독지로 설립된 부여군 장암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수학하다가 서울의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1940년에는 경기공립중학교(현제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으며, 이어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1948년에 마쳤다. 그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여, 1952년 동교를 졸업과 동시에 고향의 부여고등학교에서 교육자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1956년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교수로 1959년까지 봉직하였으며, 그 이듬해부터 공주사범대학, 청구대학을 거쳐 1964년부터 다시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육성에 전념하였다.

1965년부터 화학공학과장을 맡으면서 공과대학 교무과장(1966∼1969), 교양학부장(1967∼1968)을 거쳐 1969년부터 1972년까지 공과대학 학장의 중책을 맡았다.
1972년부터 대학원 위원을 맡으면서 오랜 각고의 보람으로 1974년에 충남대학교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6년부터 충남대학교 발전계획 기획위원회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 분과위원회, 경영대학원 위원회 위원을 맡아 대학 발전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9년에는 공업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충청남도 학술부문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81년부터 타계할때까지 충남대학교 대학원장의 중책을 수행하면서 교육행정의 책임자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로하여 후학과 동료 교수들에게 모범을 보여왔다. 1983년에는 공업입국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민교육헌장선포 15주년 기념 포상으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하였다.
1985년 3월 7일 타계하였으며, 부인 신태철 여사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고,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선영하에 있다.
부친의 독지로 설립된 부여군 장암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수학하다가 서울의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다.
1940년에는 경기공립중학교(현제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으며, 이어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1948년에 마쳤다. 그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여, 1952년 동교를 졸업과 동시에 고향의 부여고등학교에서 교육자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1956년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화학과 교수로 1959년까지 봉직하였으며, 그 이듬해부터 공주사범대학, 청구대학을 거쳐 1964년부터 다시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육성에 전념하였다.

1965년부터 화학공학과장을 맡으면서 공과대학 교무과장(1966∼1969), 교양학부장(1967∼1968)을 거쳐 1969년부터 1972년까지 공과대학 학장의 중책을 맡았다.
1972년부터 대학원 위원을 맡으면서 오랜 각고의 보람으로 1974년에 충남대학교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6년부터 충남대학교 발전계획 기획위원회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 분과위원회, 경영대학원 위원회 위원을 맡아 대학 발전에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9년에는 공업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충청남도 학술부문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81년부터 타계할때까지 충남대학교 대학원장의 중책을 수행하면서 교육행정의 책임자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로하여 후학과 동료 교수들에게 모범을 보여왔다. 1983년에는 공업입국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민교육헌장선포 15주년 기념 포상으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하였다.
1985년 3월 7일 타계하였으며, 부인 신태철 여사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고,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선영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