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박계홍선생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46
1937년 1월 19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나복리 259번지에서 부친 호성(鎬成)과 모친 이백순(李百順)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56년 2월에 부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4월에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4년을 수학하고 졸업하고, 동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가 학문을 수련하여 1964년 4월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후로 민속학을 주전공으로 학문영역을 확대 승화시켜 상당한 업적을 내었고, 1977년 12월에 동경쓰구바대학 대학원 인류학과에 들어가 민속학을 전공하여 1978년 7월에 특별연구과정을 마쳤다.
그 뒤로 귀국하여 교수·연구하여「한국당제연구(韓國堂祭硏究)」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1년 4월부터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가 되어 1968년 12월까지 학문의 길을 닦았다. 1969년 학문과 인품이 인정되어 동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임명되었다. 1971년 조교수가 되었고, 1975년 7월부터 부교수로 승진되었으며, 1981년에 44세로 정교수가 되어 민속학과 구비문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그리고 연구·교수의 여가에 학내보직과 학회활동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72년 4월부터 1974년 2월까지 2차에 걸쳐 충대신문사 주간을 지냈고, 1975년 6월부터 1977년 3월까지 동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과장 교무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79년 동대학 국어국문학과 학과장으로 있다가 다시 동대학 교무과장으로 일하였다.
1983년 다시 동대학 국어국문학과 학과장을 맡으면서 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학과주임과 동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주임을 겸임하여 대학원 교육과 학풍진작에 기여하였다.
학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학문적 업적과 학술교류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1963년부터 줄곧 전국국어국문학회 회원·간사·평의원으로 노력하였고, 1964년부터 계속 한국언어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69년부터는 민속학회 회원·이사로 학회운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일본 민족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해외연수에도 자주 참석하여 문학적 안목을 넓히고 국제적 학술 교류를 적극 추진하였다. 1974년 7월부터 8월까지, 1976년 7월부터 8월까지 두차례에 걸쳐 일본 민속의 한·일 합동조사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1977년 2월부터 3월까지는 중국의 대북에 가서 대학교육의 실태를 시찰하였다.
1980년 11월에는 일본대총민속학회 연례학술회의에 참석하였고, 1988년 1월에는 미국에서 열린 민속학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여 학술교류의 성과를 거두었다.
1988년 3월부터 1년간 일본지역 중 한국에 근접한 구역의 민속을 조사, 비교연구하기 위하여 출국을 앞두고 참변으로 안타깝게 타계하였다.
학문적으로 민속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어 『한국민속연구』외 9종의 저서와 중요논문 50여편이 있으며, 그리고 민속학 내지 고전문학에 관한 논설이 158편, 수필이 25편 발표되었다.
그는 활동과정에서 그 업적으로 여러 상훈을 받았는데, 1971년 5월에 충남대학교에서 10년 근속 연공표창과 1981년 5월 20일 근속 연공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1973년 12월에 충청남도 문화상 인문과학부문 학술상, 1979년 12월 국민교육헌장 선포 11주년 기념 공적표창을 받았다.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숙(金英淑)과 슬하에 5명의 자녀가 있고, 묘소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선산에 있다.

그 후로 민속학을 주전공으로 학문영역을 확대 승화시켜 상당한 업적을 내었고, 1977년 12월에 동경쓰구바대학 대학원 인류학과에 들어가 민속학을 전공하여 1978년 7월에 특별연구과정을 마쳤다.
그 뒤로 귀국하여 교수·연구하여「한국당제연구(韓國堂祭硏究)」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1년 4월부터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가 되어 1968년 12월까지 학문의 길을 닦았다. 1969년 학문과 인품이 인정되어 동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강사로 임명되었다. 1971년 조교수가 되었고, 1975년 7월부터 부교수로 승진되었으며, 1981년에 44세로 정교수가 되어 민속학과 구비문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그리고 연구·교수의 여가에 학내보직과 학회활동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72년 4월부터 1974년 2월까지 2차에 걸쳐 충대신문사 주간을 지냈고, 1975년 6월부터 1977년 3월까지 동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과장 교무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79년 동대학 국어국문학과 학과장으로 있다가 다시 동대학 교무과장으로 일하였다.
1983년 다시 동대학 국어국문학과 학과장을 맡으면서 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학과주임과 동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주임을 겸임하여 대학원 교육과 학풍진작에 기여하였다.
학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학문적 업적과 학술교류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1963년부터 줄곧 전국국어국문학회 회원·간사·평의원으로 노력하였고, 1964년부터 계속 한국언어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69년부터는 민속학회 회원·이사로 학회운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일본 민족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해외연수에도 자주 참석하여 문학적 안목을 넓히고 국제적 학술 교류를 적극 추진하였다. 1974년 7월부터 8월까지, 1976년 7월부터 8월까지 두차례에 걸쳐 일본 민속의 한·일 합동조사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1977년 2월부터 3월까지는 중국의 대북에 가서 대학교육의 실태를 시찰하였다.
1980년 11월에는 일본대총민속학회 연례학술회의에 참석하였고, 1988년 1월에는 미국에서 열린 민속학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여 학술교류의 성과를 거두었다.
1988년 3월부터 1년간 일본지역 중 한국에 근접한 구역의 민속을 조사, 비교연구하기 위하여 출국을 앞두고 참변으로 안타깝게 타계하였다.
학문적으로 민속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어 『한국민속연구』외 9종의 저서와 중요논문 50여편이 있으며, 그리고 민속학 내지 고전문학에 관한 논설이 158편, 수필이 25편 발표되었다.
그는 활동과정에서 그 업적으로 여러 상훈을 받았는데, 1971년 5월에 충남대학교에서 10년 근속 연공표창과 1981년 5월 20일 근속 연공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1973년 12월에 충청남도 문화상 인문과학부문 학술상, 1979년 12월 국민교육헌장 선포 11주년 기념 공적표창을 받았다. 그의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숙(金英淑)과 슬하에 5명의 자녀가 있고, 묘소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선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