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민병현선생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111
교육자 민병현선생은 1919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에서 출생하였다. 1937년 공주 공립고등보통학교(5년)을 졸업하고 아동교육에 뜻을 세워 관립 전주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였다.
1938년에 공주 이인공립심상소학교의 훈도(교사)를 시작으로 부여 부소국민학교, 공주 제삼국민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교육행정 기관에서 인정되어 1948년 공주 여자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교사로 발탁되어, 2년 후에는 교감으로 승진되었다. 부속국민학교 교사 때는 전국적으로 전파된 새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아동활동을 강조하는 구안법, 문제해결법, 분단학습 등을 학습지도에 적용하였다.
교사 중심의 전통적 방법에서 탈피하여 아동 중심의 새로운 방법으로 학습지도의 방법을 전화시키는데 꾸준히 연구 노력하였다.
그리고 교감 때는 교육과정 연구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긴 직후부터 새로운 교육사조와 교육방법이 물밀 듯이 쏟아져 왔다. 중학 교육과정, 가이던스, 카운슬림, 홈룸, 객관적 측정법, 표준화 검사 등에 관심을 갖고 특히 교육과정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민병현은 1952년에 공주 교육구 장학사로 전임되어 새로운 교육방법을 일반 학교에 적용시키는데 노력하였으며, 1954년에는 연기군 연서국민학교장으로 승진하였다. 동교는 농촌 오지에 위치한 학교로 학교시설에 미비한 곳이 많았으며 지역민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학교환경을 쾌적한 환경으로 일신하는 한편 주민의 계도를 위해 사랑방 교실을 개설하였다.

사랑방 교실은 주민들을 문맹으로부터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방과 후의 시간이나 야간을 이용하여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이 봉사정신의 공로로 충청남도 지사로부터 제3차 전국문맹퇴치 교육공로가 표창을 받았다. 1957년에 다시 부여 교육구 장학사로 전임되었고, 이어서 대전시 교육위원회 장학사, 보령 교육청 학무과장, 서천군 교육과장, 홍성군 교육과장, 연기군 교육청 학무과장을 역임하였다. 이 10년 동안 그는 주로 인사업무를 담당하였데 업무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원리원칙에서 벗어남이 없었으며,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이 공휴일도 없이 근무하였다. 1960년에 면려 포장을 받고, 1962년에는 국민훈장 녹조소성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1967년 오랜 기간 몸담아 온 교육 전문직을 떠나 대전 석교국민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동교는 부대시설이 미비하고 교지도 정리되지 않은 곳이 많았는데, 지역민과 독지가의 지원을 받는 한편 전 교직원과 힘을 합하여 불과 1년여의 짧은 기간에 학교환경의 기틀을 잡아서 학교다운 면모를 만들게 되었다.
1968년에 또다시 교육 전문직으로 발탁되어 충청남도 교육위원회 학무국 초등교육과 인사계장으로 발령되어 충청남도 내의 교원 인사를 2년여 담당하면서 청렴과 결백을 일관되게 지켰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1971년 10월에 기성국민학교에서 34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퇴직후 충청남도 교육공제회에서 8년간 재임하며 공제회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슬하에 4남5녀를 두었으며, 고혈압으로 장기간 병석에서 고생하다가 1991년 3월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에 있다.
1938년에 공주 이인공립심상소학교의 훈도(교사)를 시작으로 부여 부소국민학교, 공주 제삼국민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당시 교육행정 기관에서 인정되어 1948년 공주 여자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 교사로 발탁되어, 2년 후에는 교감으로 승진되었다. 부속국민학교 교사 때는 전국적으로 전파된 새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아동활동을 강조하는 구안법, 문제해결법, 분단학습 등을 학습지도에 적용하였다.
교사 중심의 전통적 방법에서 탈피하여 아동 중심의 새로운 방법으로 학습지도의 방법을 전화시키는데 꾸준히 연구 노력하였다.
그리고 교감 때는 교육과정 연구를 활발히 추진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긴 직후부터 새로운 교육사조와 교육방법이 물밀 듯이 쏟아져 왔다. 중학 교육과정, 가이던스, 카운슬림, 홈룸, 객관적 측정법, 표준화 검사 등에 관심을 갖고 특히 교육과정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민병현은 1952년에 공주 교육구 장학사로 전임되어 새로운 교육방법을 일반 학교에 적용시키는데 노력하였으며, 1954년에는 연기군 연서국민학교장으로 승진하였다. 동교는 농촌 오지에 위치한 학교로 학교시설에 미비한 곳이 많았으며 지역민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학교환경을 쾌적한 환경으로 일신하는 한편 주민의 계도를 위해 사랑방 교실을 개설하였다.

사랑방 교실은 주민들을 문맹으로부터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방과 후의 시간이나 야간을 이용하여 주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이 봉사정신의 공로로 충청남도 지사로부터 제3차 전국문맹퇴치 교육공로가 표창을 받았다. 1957년에 다시 부여 교육구 장학사로 전임되었고, 이어서 대전시 교육위원회 장학사, 보령 교육청 학무과장, 서천군 교육과장, 홍성군 교육과장, 연기군 교육청 학무과장을 역임하였다. 이 10년 동안 그는 주로 인사업무를 담당하였데 업무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원리원칙에서 벗어남이 없었으며,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이 공휴일도 없이 근무하였다. 1960년에 면려 포장을 받고, 1962년에는 국민훈장 녹조소성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1967년 오랜 기간 몸담아 온 교육 전문직을 떠나 대전 석교국민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동교는 부대시설이 미비하고 교지도 정리되지 않은 곳이 많았는데, 지역민과 독지가의 지원을 받는 한편 전 교직원과 힘을 합하여 불과 1년여의 짧은 기간에 학교환경의 기틀을 잡아서 학교다운 면모를 만들게 되었다.
1968년에 또다시 교육 전문직으로 발탁되어 충청남도 교육위원회 학무국 초등교육과 인사계장으로 발령되어 충청남도 내의 교원 인사를 2년여 담당하면서 청렴과 결백을 일관되게 지켰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1971년 10월에 기성국민학교에서 34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퇴직후 충청남도 교육공제회에서 8년간 재임하며 공제회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슬하에 4남5녀를 두었으며, 고혈압으로 장기간 병석에서 고생하다가 1991년 3월에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