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4-09
조회
53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외가의 안동권씨댁 마을인 이곳(당시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태어난 곳이 어남동 도리미마을이다.

8세에 아버지를 여윈 그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반대하였으며 1928년 대만의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6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가장 위대한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는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외롭게 그의 평생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 57세였다. 1992년 여름에 생가터에 대한 발굴조사와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하여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기념물 제26호)
조국과 겨레를 위하여 정신의 활화산처럼 희망의 불꽃을 일으킨 가장 우뚝 선 선열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은 본관이 고령이고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후손으로서 1880년 12월 2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도리)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공과 밀양박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나 군핍한 유년기를 진외가인 안동 권씨 촌 이곳에서 보냈다.
1887년 부친이 별세하자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고두미)로 이사하여 한학을 수업했고 1895년 국모시해사건이 일어난 뒤 국운이 위급하게 됨을 보고 선생은 1898년 고향을 떠나 상경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면서 신풍을 일으키기 7년 셩균관박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국민사상의 개혁과 국권수호가 급선무라고 생각한 선생은 박사를 사퇴하고 1905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준렬한 무관의 언관 사관으로 한말의 풍운과 겨루어 나갔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라가 일단 끝장나리라는 것을 직각한 선생은 1910년 국외로망명하여 1918년까지 연해주에서 광복회부회장 권업신문 주필을 역임하면서 예리한 필봉으로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독랍운동의 정도을 밝히며 동제사 대한독립 청년단 등을 조직에 침획하였고 대동단결의 선언 대한독립선언서등을 기초로 발표하였다.
선생이 망명한 뒤 상해로 북경으로 주로 수만리를 편답하면서 첫째 소원은 조국의 광복이었다고 다음은 민족사의 근원을 찾아 빽빽이 이어내린 정기를 천주에 전하고자 함이였다.
그래서 언제나 때 묻은 청포 하나 몸에 걸치고도 웃으면서 만주 각지를 누볐고 우리나라 옛 강역을 찾아 광계토대왕비 탐사를 비롯해 우리 역사에 관계된 사적을 뒤졌었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서게 되자 선생은 임시정원 의원 전원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독립정부의 방향을 제시했고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의 정신과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올바른 역가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론이라 할 조선상고사 총론에서선생은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여 아는 곧 한국민족이었고 비아는 이민족이었으니 선생의 한국사는 한민족과 이민족, 한국사상과 외래사상의 투쟁사였다. 1920년에서 1927년 사이 선생은 대일무력항쟁의 계획으로 북경에서 군사통일책진회를 조직하고 제2의 보할단을 조직하였으며 위임통치청원을 통박하는 성토문과 의열장의 조산혁명선언을 기초 발표하는 한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쟁취운동에 헌신하였다.
1928년 항일족립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중대만 기륭 항에서 상륙 직전 일경에 피체되어 여순감옥에서 10년행형중 1936년 2월 21(음 1월 28일) 5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일뿐 아니라 탁월한 사학가로로서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 불후의 명저를 남겼고 또한 이태리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전기와 소설 꿈하늘, 용과용의대격전, 그밖에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선생의 유해는 가족들 손으로 향리로 봉환 안장되었고 1962년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장하여라 자재선생! 영원한천하의 선비로 민족정기의 권화인 단재선생은 이고장이 낳은 오천년 역사의 인간문화재로 홀로 우뚝하리라.
1988년 11월
일 전 수원대학교교수 최홍규 짓고
대덕군수 감 덕 중 세움

8세에 아버지를 여윈 그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마을로 옮겨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반대하였으며 1928년 대만의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6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가장 위대한 근대 민족주의 역사가요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는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외롭게 그의 평생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 57세였다. 1992년 여름에 생가터에 대한 발굴조사와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하여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기념물 제26호)
조국과 겨레를 위하여 정신의 활화산처럼 희망의 불꽃을 일으킨 가장 우뚝 선 선열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선생은 본관이 고령이고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후손으로서 1880년 12월 2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도리)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공과 밀양박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나 군핍한 유년기를 진외가인 안동 권씨 촌 이곳에서 보냈다.
1887년 부친이 별세하자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고두미)로 이사하여 한학을 수업했고 1895년 국모시해사건이 일어난 뒤 국운이 위급하게 됨을 보고 선생은 1898년 고향을 떠나 상경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면서 신풍을 일으키기 7년 셩균관박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국민사상의 개혁과 국권수호가 급선무라고 생각한 선생은 박사를 사퇴하고 1905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준렬한 무관의 언관 사관으로 한말의 풍운과 겨루어 나갔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라가 일단 끝장나리라는 것을 직각한 선생은 1910년 국외로망명하여 1918년까지 연해주에서 광복회부회장 권업신문 주필을 역임하면서 예리한 필봉으로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독랍운동의 정도을 밝히며 동제사 대한독립 청년단 등을 조직에 침획하였고 대동단결의 선언 대한독립선언서등을 기초로 발표하였다.
선생이 망명한 뒤 상해로 북경으로 주로 수만리를 편답하면서 첫째 소원은 조국의 광복이었다고 다음은 민족사의 근원을 찾아 빽빽이 이어내린 정기를 천주에 전하고자 함이였다.
그래서 언제나 때 묻은 청포 하나 몸에 걸치고도 웃으면서 만주 각지를 누볐고 우리나라 옛 강역을 찾아 광계토대왕비 탐사를 비롯해 우리 역사에 관계된 사적을 뒤졌었다.
1919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서게 되자 선생은 임시정원 의원 전원위원장 등을 역임하여 독립정부의 방향을 제시했고 신대한의 주필로 독립운동의 정신과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는 동시에 국민에게 올바른 역가의식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론이라 할 조선상고사 총론에서선생은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하여 아는 곧 한국민족이었고 비아는 이민족이었으니 선생의 한국사는 한민족과 이민족, 한국사상과 외래사상의 투쟁사였다. 1920년에서 1927년 사이 선생은 대일무력항쟁의 계획으로 북경에서 군사통일책진회를 조직하고 제2의 보할단을 조직하였으며 위임통치청원을 통박하는 성토문과 의열장의 조산혁명선언을 기초 발표하는 한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참여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독립쟁취운동에 헌신하였다.
1928년 항일족립투쟁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중대만 기륭 항에서 상륙 직전 일경에 피체되어 여순감옥에서 10년행형중 1936년 2월 21(음 1월 28일) 5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일뿐 아니라 탁월한 사학가로로서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 불후의 명저를 남겼고 또한 이태리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전기와 소설 꿈하늘, 용과용의대격전, 그밖에 많은 글들을 남겼다. 선생의 유해는 가족들 손으로 향리로 봉환 안장되었고 1962년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장하여라 자재선생! 영원한천하의 선비로 민족정기의 권화인 단재선생은 이고장이 낳은 오천년 역사의 인간문화재로 홀로 우뚝하리라.
1988년 11월
일 전 수원대학교교수 최홍규 짓고
대덕군수 감 덕 중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