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동(山城洞)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4-09
조회
33
충남 금산군과 경계로 농촌과 도시의 복합형이며 산서지역은 예부터 대대 손손 농업을 주로 삼고 강한 애착심을 갖고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세대가 많아 효의 원천이 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주민편익시설로 안영IC에 인접한 농산물유통센터, 대전 오월드, 안영생활체육단지(축구 5개구장 보유)가 있으며 효의 상징인 중구 효문화마을관리원 , 뿌리공원, 한국효문화진흥원이 위치하고 있어 전국에서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산성동(山城洞)은 당대(당디)가 중심마을이었다. 그 뒤 일제 강점 아래 대전의 시세가 확장됨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면서 산수의 경치가 뛰어난 곳이라 하여 산수정(山水町)이라 부르다가 조국 광복후 일본식 동명을 없애라는 행정지시에 따라 산성동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부르게 된 것이다.

사정동(沙亭洞)은 옛날 사기점(沙器店)이 있어서 사정(沙亭)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와 함께 마을 어귀에 큰 반송이 서 있으며 모래수렁이 있었던 마을이라 사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영동(安永洞)은 금산군과 시의 경계를 동쪽으로는 침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정동과 접했고 서쪽 방향에는 서구의 복수동, 괴곡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본래 바깥길이 아닌 안길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안(安)-길(永) 동네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함께 양반들이 정착해 살면서 평안한 영세를 누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안영동은 원안영, 도장골, 새동네, 신봉 검바우, 부흥동, 창명, 새뜸, 성산주막거리, 겸나무 주막거리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구완동(舊完洞)은 보문산 안쪽으로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온 사람은 모두 완전히 피해없이 잘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완전(完全)이라고 부르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후 정유재란 때 여기 완전 남동쪽 4㎞ 지점의 소호동의 아늑한 산골에서도 피난온 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피난하였으므로 이곳도 완전이라고 부르게 됨에 따라 그 지명을 구분하기 위해서 임진왜란 때 피난처였던 이곳은 구완전(舊完全)이라 부르고 정유재란 때 피난처였던 소호동은 신완전(新完全)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수동(無愁洞)은 무쇠가 나는 지역임으로 무쇠골, 수철리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숙종때 대산간 권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그의 호를 무수옹(無愁翁)이라하고 또한 그가 사는 마을을 무수리라고 부르던 것이 연유되어 그리 부르게 되었다.
침산동(砧山洞)은 방아와 같은 두 봉우리의 방아미 즉 침산이었으므로 옛날부터 방아미, 침산이라고 불러왔었다.
목달동(木達洞)은 보문산 남쪽 산 높이 249m의 남달산 아래 지역에 있으면서 마을에 해묵은 박달나무가 하나 있으므로 목달이라 불렀었다.
정생동(政生洞)은 옛날 유명한 지관이 여기를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정승이 나올 지역으로 꼽았으며 또한 옛날 우봉 이씨가 정승을 그만두고 여생을 보낸 지역이기도 하다. 이 부근에 남생바위로 부르는 바위가 있어서 남생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정생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어남동(於南洞)은 산 높이 413m의 만인산 서쪽에 있는 느나미 즉 어남산 아래 있는 산골 두메가 되므로 느나미 또는 어남이라고 불렀다.
금동(錦洞)은 아늑한 지역이므로 금댕이 또는 금동이라 불렀다
https://www.djjunggu.go.kr/kr/sub05_04_17_01.do
산성동(山城洞)은 당대(당디)가 중심마을이었다. 그 뒤 일제 강점 아래 대전의 시세가 확장됨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면서 산수의 경치가 뛰어난 곳이라 하여 산수정(山水町)이라 부르다가 조국 광복후 일본식 동명을 없애라는 행정지시에 따라 산성동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부르게 된 것이다.

사정동(沙亭洞)은 옛날 사기점(沙器店)이 있어서 사정(沙亭)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와 함께 마을 어귀에 큰 반송이 서 있으며 모래수렁이 있었던 마을이라 사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영동(安永洞)은 금산군과 시의 경계를 동쪽으로는 침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사정동과 접했고 서쪽 방향에는 서구의 복수동, 괴곡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본래 바깥길이 아닌 안길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안(安)-길(永) 동네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함께 양반들이 정착해 살면서 평안한 영세를 누렸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는 안영동은 원안영, 도장골, 새동네, 신봉 검바우, 부흥동, 창명, 새뜸, 성산주막거리, 겸나무 주막거리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구완동(舊完洞)은 보문산 안쪽으로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온 사람은 모두 완전히 피해없이 잘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완전(完全)이라고 부르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후 정유재란 때 여기 완전 남동쪽 4㎞ 지점의 소호동의 아늑한 산골에서도 피난온 사람들이 모두 안전하게 피난하였으므로 이곳도 완전이라고 부르게 됨에 따라 그 지명을 구분하기 위해서 임진왜란 때 피난처였던 이곳은 구완전(舊完全)이라 부르고 정유재란 때 피난처였던 소호동은 신완전(新完全)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수동(無愁洞)은 무쇠가 나는 지역임으로 무쇠골, 수철리라 불렀는데 조선시대 숙종때 대산간 권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그의 호를 무수옹(無愁翁)이라하고 또한 그가 사는 마을을 무수리라고 부르던 것이 연유되어 그리 부르게 되었다.
침산동(砧山洞)은 방아와 같은 두 봉우리의 방아미 즉 침산이었으므로 옛날부터 방아미, 침산이라고 불러왔었다.
목달동(木達洞)은 보문산 남쪽 산 높이 249m의 남달산 아래 지역에 있으면서 마을에 해묵은 박달나무가 하나 있으므로 목달이라 불렀었다.
정생동(政生洞)은 옛날 유명한 지관이 여기를 지나다가 산세를 보고 정승이 나올 지역으로 꼽았으며 또한 옛날 우봉 이씨가 정승을 그만두고 여생을 보낸 지역이기도 하다. 이 부근에 남생바위로 부르는 바위가 있어서 남생골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정생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어남동(於南洞)은 산 높이 413m의 만인산 서쪽에 있는 느나미 즉 어남산 아래 있는 산골 두메가 되므로 느나미 또는 어남이라고 불렀다.
금동(錦洞)은 아늑한 지역이므로 금댕이 또는 금동이라 불렀다
https://www.djjunggu.go.kr/kr/sub05_04_17_01.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