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동(柳川洞) 산신제, 거리제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71
유천동(柳川洞) 산신제, 거리제
(1) 조사지 개관
유천동은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등천면(유포면)이었는데, 영조 때는 원대리라 불렸던 지역이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유천면 당대리, 창리, 원대리, 탑동리 등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유천면 유천리로 통합되었다. 1935년 대전부의 설치로 대전부 유천정으로 편입되었으며, 1949년 대전시의 시승격으로 대전시 유천동이 되었다.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 유천동이 되었고, 이 해에 태평동, 산성동, 문화동 일부가 유천동에 편입되었다.

1982년 인구 증가로 유천 1동과 유천2동으로 분리하였다. 그 뒤 1989년 대전직할시 중구 유천동이 되었다.
유천1동은 서북간으로 태평동과 접하고, 서쪽으로 유등천을 구계로 하여 도마동에 인접하고, 남쪽으로 산성동, 동북간으로는 유천2동, 동남간으로는 문화2동과 인접해 있다. 따라서 계백로, 문화로, 서부터미널진입로, 태평로 등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행정관할 구역은 20통 104개 반이다. 유천1동의 주요기관과 단체 등을 살펴보면, 호남교통의 요충지인 서부터미널과 상가지역 2, 금융기관 6, 병의원 10, 경로당 3, 공원 3, 종교기관 10개 등이 있다. 현재는 상가 및 유흥가의 밀집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유천1동의 자연마을은 가운데 벌말(중평, 중평리(中坪里)), 버드내, 벌말, 새터 등이 있다. 중평은 중평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의 산성동, 유천동, 태평동에 이르는 벌을 위별, 가운데벌, 아랫벌로 나누는데, 가운데 벌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데벌말이라 하였다. 버드내는 버드냇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버드내, 유등천, 유천, 유천리라고 부르던 마을로 유등천변에 위치해 있었다. 옛날에는 수이므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버드내에 있던 돌다리를 ‘가운데 벌말의 돌다리’라고 한다.
이 돌다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 돌다리가 있었던 옛날에는 마을의 어린이들이 여기서 물놀이를 즐겼었다. 그런데 어느 해 이른 봄 이 마을에 홍역이 크게 번져 한 아이가 죽게 되자 그 아이를 유등천에 버렸다고 한다. 이후로 며칠 사이에 마을의 모든 어린이가 전멸되다시피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은 어린이를 이 돌다리에 버렸기 때문에 산신령이 노하여 많은 어린이가 죽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돌다리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벌말은 버드내 앞 들판에 있는 마을이다. 들에 있다 하여 벌말, 평리라고 부르고 벌말 가운데 있는 마을은 중평(中坪), 위쪽마을을 상평(上坪)이라고 불렀다. 상평은 윗벌말이라고도 하는데, 이 곳에는 산제당이 있다. 매년 음력 동짓달 초사흗날에 마을이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새터는 현재의 유천종합시장 자리에 있었던 마을이다.
유천2동은 호남선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오류동, 문화1동과 동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문화로로 문화1동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태평동, 서남쪽으로는 유천1동과 동계를 이룬다. 1993년 12월 현재 면적이 0.67㎢이고, 5,497세대(인구 18,951명)가 거주하고 있다. 행정관할 구역은 30통, 148개 반이다. 기관 단체 등으로 원평초등학교를 비롯하여 금융기관 6, 제조업체 6, 의원 12, 경로당 2, 놀이터 3개소가 있다. 현재 신개발 지역으로 80%가 주거지역이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가지역이 형성되어 가는 추세이다.
유천2동의 자연마을은 창말, 철둑거리 등이 있다. 창말은 들말 위쪽에 있는 상평(上坪)마을 옆에 있는 마을이다. 사창(社倉)의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한다. 철둑거리는 유천2동과 문화동 사이 기찻길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말한다. 철로를 가설하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이것이 철둑이고, 그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자 그곳을 철둑거리라고 불렀다 한다.
(2) 제의 실태
① 유천동 산신제
음력 동짓달 초사흗날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어느 주민의 꿈에서 산제를 지내면 각종 재난 및 질병을 방어하여 주고 각 가정에 행운이 깃든다는 선몽에 의하여 산제당을 짓고 산신제를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는 예전에는 호랑이 피해가 많았기에 이를 막고자 제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산신제는 ‘산신제보존회(회장 유명준)’ 주관으로 지내고 있다. ‘산신제보존회’는 1995년 12월에 산신제를 지낸 후 총회를 열어 발족하였는데, 유향계 회원이 운영한다. 유향계는 1966년도에 마을 총회를 열어 주민들을 상평, 중평, 하평, 새터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결성하였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주민이라면 누구라도 계원이 될 수 있었으며, 의무적이기도 하였다.
구획 정리시 주민들이 제당을 없애자고 하였으나 위하는 것이므로 공동 명의로 등기 이전을 하여 지금껏 보존하여 왔다. 그러나 관리상의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산제가 존폐 위기에 처해 있다가 1997년 1월 9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주민들의 주장은 개인 명의로 되어 있으므로 그분들이 돌아가신 이후의 상속 문제와 재산세 납부의 문제, 제당 관리 등의 여러 가지를 들어 제 지내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관에 호소하였다.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이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들어 이를 보존할 대책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소박한 믿음이 관의 지원으로 유지되게 되었다.
유천 종합상가 근처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256-4번지에 산 제당이 있다. 산 제당은 대지 30평에 건평이 2평 정도인 단칸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목조건물이었는데, 1987년에 동민의 성금으로 신축하였다. 안쪽에는 흙벽을, 바깥벽은 송판을 덧대어 놓고, 지붕에는 검정기와를 얹어 매우 허름하다. 신축 당시 내부에 있던 산신도가 낡아서 새로 그려 봉안하였다. 일부에서는 제당 안의 신령을 보문산 신령이라고 하지만 주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의 매우 적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을 보호하는 신령으로만 인식할 뿐 구체화시키고 있지는 않았다.
당집 앞에는 수 백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지키고 묵묵히 서있다. 이 나무는 원래는 없던 것으로, 주민들이 나무가 없으니 허전하다 하여 보문산에 가서 캐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산신당이 위치한 자리는 다른 곳보다 높아 언덕을 이루었던 지대였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쌓여 평평한 지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예전의 풍경은 짐작할 수도 없이 변모하였다. 예전에는 산신당 주변 약 50평 정도의 땅에서 물이 나오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제를 앞두고 한 달 전에 미리 유향계 계원 가운데 생기 복덕을 가려서 제관, 축관, 집사 등을 각기 한명씩 총 세 명을 선정한다. 제관은 매일 목욕재계를 해서 몸을 깨끗이 유지한다. 예전에는 중평 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가면서 목욕재계를 했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없어졌으므로 집에서 하고 있다.
예전에는 제 지내기 일주일 전부터 제관을 비롯한 모든 동민들이 몸속에 있는 이조차 잡지 않을 만큼 엄한 금기를 지켰다고 하는데, 지금은 단지 제관만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여전히 제를 잘못 지내면 제관이 해를 입는다고 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제를 사흘 앞두고 유사는 산제당과 그 옆의 박 샘과 자신의 집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도 놓는다. 황토는 대문 양쪽에 각기 세 무더기씩 모두 여섯 무더기를 피운다. 박 샘은 먼저 물을 품고 청소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두면 사흘간은 제관 이외의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하다. 주민들은 미리 사흘간 사용할 물을 떠다 놓는다.
만약 산신제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생기면 제일을 일주일쯤 연기하였으나 도시화되면서 일일이 부정을 가릴 수 없어 초상이나 출산이 생겨도 제일을 변경하지 않고 있다.
제비는 각 가정마다 쌀을 한 되나 두 되를 내는 것으로 제비를 하였으나 지금은 기금으로 충당한다. 기금은 약 20년 전에 거두었던 것으로 산제당을 보수하고 남겨 놓은 것이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명태포, 밥, 떡(흰무리, 세 되 세흡 분량), 탕, 술 따위를 올린다. 유사가 당일 아침 시장에 가서 정갈한 것으로 사서 쓴다. 물건을 사면서 값을 깎거나 흥정을 하지 않으며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물은 유사 집에서 모두 마련해서 산제당으로 옮긴다. 예전에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돼지는 깨끗하고 연고가 없는 집의 것을 구입하며, 혹여 부정이 탈까하여 당일에 몰고 와서 산 제당 옆에서 직접 잡는다. 이 때 제당의 문은 열지 않고 칼로 목을 찌른 후 피를 받아내고 이어 다시 유사 집으로 옮긴다.
제관 일행은 도포에 유관을 쓴다. 마을 사람들이 참관을 한 가운데 제의를 진행한다. 제의 절차는 일반 가정의 제사와 비슷하다.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하여 강신한 다음 재배하고 초헌, 아헌, 종헌을 하고 삼베를 올린다. 초헌을 하고 제관 일행이 재배한 다음 독촉과 소지를 올린다.
축문은 본래 한자로 쓰여 진 것이었는데, 한자를 읽은 줄 아는 사람이 줄어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여 1970년대 후반에 새로 작성하여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대략 산신의 보호에 감사드리고 동민들은 물론 축생에 이르기까지 무사와 행운, 소원성취를 비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1987년에 사용하였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축문의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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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축문은 1978년에 사용했던 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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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는 산신소지를 먼저 올리고, 이어 호당 한 장씩 소지를 올려주었다. 중년에 호당 올려주던 소지를 반별 소지로 바꾸었다. 그러나 유향계가 결성된 이후로는 유향계 회원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런 후 동사무소, 파출소, 농협, 마을금고 등의 기관이나 단체, 영업장의 소지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제를 마치고 난 후에는 그 이튿날 유사 집에 모여 음복을 하였으나 근래에는 당일 저녁에 식당을 정해서 식사를 하고 있다.
② 유천동 거리제
이전에는 정월 열 나흗날에 거리제를 지냈으나 한동안 폐지하였다가 1997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거리제는 유천동과 태평동의 경계에 있던 선돌형 장승에서 지냈다. 시내 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교통이 번잡하여 제를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승은 유천 2동 대우장 사거리에 있었는데, 이곳은 태평동(하평)과 중평 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상돌’ 혹은 ‘선돌’이라고 명명하였다. 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사흘 전에 미리 왼새끼에 길지를 꽂아 둘러놓는다. 현재는 유천 2동 동사무소로 사용될 예정 건물 앞에 놓여져 있으며, 그곳에서 1997년도에는 제를 지냈다.
거리제를 지내려면 먼저 제를 주관할 제관을 낸다. 산신제 제관이 겸임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제관을 선출해야 했다. 그가 사흘 전에 선돌에 금줄을 꼬아다가 둘 러 놓는다. 이 때 황토는 놓지 않는다. 제비는 걸립을 하여 마련했는데, 가가호호를 돌면서 지신을 밟아준다. 이를 ‘샘고사’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여 비용이 마련되면 유사가 제물을 구입한다. 다른 제물은 산신제와 동일하나 돼지머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당일 어두워지면 유사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울리면서 제장으로 나간다. 선돌 앞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제물을 진설한 후 제를 진행한다. 술을 올리고 재배한 후 이어 축을 읽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호당 한 장씩 올려 주었으나 해방 후로는 반별로 올렸다. 이름을 호명하며 가정이 평안하고 질병에 걸리지 말기를 축원해준다. 이렇게 하여 제를 마친 후에는 그 자리에서 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한바탕 풍물을 울리면 논다.
<대전광역시 중구, 1998, pp.931~934./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67~70./유명준(남 64세 1997년 현재, T.584-2059, 6대째 거주)/권영운(남 84세 1997년 현재, 유향계 회원으로 초기 유향계원의 사진을 보관하고 있음, T.532-4858)>
(1) 조사지 개관
유천동은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등천면(유포면)이었는데, 영조 때는 원대리라 불렸던 지역이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유천면 당대리, 창리, 원대리, 탑동리 등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유천면 유천리로 통합되었다. 1935년 대전부의 설치로 대전부 유천정으로 편입되었으며, 1949년 대전시의 시승격으로 대전시 유천동이 되었다.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 유천동이 되었고, 이 해에 태평동, 산성동, 문화동 일부가 유천동에 편입되었다.

1982년 인구 증가로 유천 1동과 유천2동으로 분리하였다. 그 뒤 1989년 대전직할시 중구 유천동이 되었다.
유천1동은 서북간으로 태평동과 접하고, 서쪽으로 유등천을 구계로 하여 도마동에 인접하고, 남쪽으로 산성동, 동북간으로는 유천2동, 동남간으로는 문화2동과 인접해 있다. 따라서 계백로, 문화로, 서부터미널진입로, 태평로 등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에 있다. 행정관할 구역은 20통 104개 반이다. 유천1동의 주요기관과 단체 등을 살펴보면, 호남교통의 요충지인 서부터미널과 상가지역 2, 금융기관 6, 병의원 10, 경로당 3, 공원 3, 종교기관 10개 등이 있다. 현재는 상가 및 유흥가의 밀집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유천1동의 자연마을은 가운데 벌말(중평, 중평리(中坪里)), 버드내, 벌말, 새터 등이 있다. 중평은 중평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의 산성동, 유천동, 태평동에 이르는 벌을 위별, 가운데벌, 아랫벌로 나누는데, 가운데 벌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데벌말이라 하였다. 버드내는 버드냇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버드내, 유등천, 유천, 유천리라고 부르던 마을로 유등천변에 위치해 있었다. 옛날에는 수이므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버드내에 있던 돌다리를 ‘가운데 벌말의 돌다리’라고 한다.
이 돌다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 돌다리가 있었던 옛날에는 마을의 어린이들이 여기서 물놀이를 즐겼었다. 그런데 어느 해 이른 봄 이 마을에 홍역이 크게 번져 한 아이가 죽게 되자 그 아이를 유등천에 버렸다고 한다. 이후로 며칠 사이에 마을의 모든 어린이가 전멸되다시피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은 어린이를 이 돌다리에 버렸기 때문에 산신령이 노하여 많은 어린이가 죽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돌다리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정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벌말은 버드내 앞 들판에 있는 마을이다. 들에 있다 하여 벌말, 평리라고 부르고 벌말 가운데 있는 마을은 중평(中坪), 위쪽마을을 상평(上坪)이라고 불렀다. 상평은 윗벌말이라고도 하는데, 이 곳에는 산제당이 있다. 매년 음력 동짓달 초사흗날에 마을이 정성을 드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새터는 현재의 유천종합시장 자리에 있었던 마을이다.
유천2동은 호남선을 따라 동북방향으로 오류동, 문화1동과 동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문화로로 문화1동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태평동, 서남쪽으로는 유천1동과 동계를 이룬다. 1993년 12월 현재 면적이 0.67㎢이고, 5,497세대(인구 18,951명)가 거주하고 있다. 행정관할 구역은 30통, 148개 반이다. 기관 단체 등으로 원평초등학교를 비롯하여 금융기관 6, 제조업체 6, 의원 12, 경로당 2, 놀이터 3개소가 있다. 현재 신개발 지역으로 80%가 주거지역이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로변을 중심으로 상가지역이 형성되어 가는 추세이다.
유천2동의 자연마을은 창말, 철둑거리 등이 있다. 창말은 들말 위쪽에 있는 상평(上坪)마을 옆에 있는 마을이다. 사창(社倉)의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 한다. 철둑거리는 유천2동과 문화동 사이 기찻길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말한다. 철로를 가설하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이것이 철둑이고, 그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자 그곳을 철둑거리라고 불렀다 한다.
(2) 제의 실태
① 유천동 산신제
음력 동짓달 초사흗날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어느 주민의 꿈에서 산제를 지내면 각종 재난 및 질병을 방어하여 주고 각 가정에 행운이 깃든다는 선몽에 의하여 산제당을 짓고 산신제를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는 예전에는 호랑이 피해가 많았기에 이를 막고자 제를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산신제는 ‘산신제보존회(회장 유명준)’ 주관으로 지내고 있다. ‘산신제보존회’는 1995년 12월에 산신제를 지낸 후 총회를 열어 발족하였는데, 유향계 회원이 운영한다. 유향계는 1966년도에 마을 총회를 열어 주민들을 상평, 중평, 하평, 새터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결성하였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주민이라면 누구라도 계원이 될 수 있었으며, 의무적이기도 하였다.
구획 정리시 주민들이 제당을 없애자고 하였으나 위하는 것이므로 공동 명의로 등기 이전을 하여 지금껏 보존하여 왔다. 그러나 관리상의 어려움이 있어 한동안 산제가 존폐 위기에 처해 있다가 1997년 1월 9일에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주민들의 주장은 개인 명의로 되어 있으므로 그분들이 돌아가신 이후의 상속 문제와 재산세 납부의 문제, 제당 관리 등의 여러 가지를 들어 제 지내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관에 호소하였다.
주민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이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들어 이를 보존할 대책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민들의 소박한 믿음이 관의 지원으로 유지되게 되었다.
유천 종합상가 근처 좁은 골목길을 지나면 256-4번지에 산 제당이 있다. 산 제당은 대지 30평에 건평이 2평 정도인 단칸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목조건물이었는데, 1987년에 동민의 성금으로 신축하였다. 안쪽에는 흙벽을, 바깥벽은 송판을 덧대어 놓고, 지붕에는 검정기와를 얹어 매우 허름하다. 신축 당시 내부에 있던 산신도가 낡아서 새로 그려 봉안하였다. 일부에서는 제당 안의 신령을 보문산 신령이라고 하지만 주민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의 매우 적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을 보호하는 신령으로만 인식할 뿐 구체화시키고 있지는 않았다.
당집 앞에는 수 백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지키고 묵묵히 서있다. 이 나무는 원래는 없던 것으로, 주민들이 나무가 없으니 허전하다 하여 보문산에 가서 캐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산신당이 위치한 자리는 다른 곳보다 높아 언덕을 이루었던 지대였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쌓여 평평한 지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예전의 풍경은 짐작할 수도 없이 변모하였다. 예전에는 산신당 주변 약 50평 정도의 땅에서 물이 나오므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제를 앞두고 한 달 전에 미리 유향계 계원 가운데 생기 복덕을 가려서 제관, 축관, 집사 등을 각기 한명씩 총 세 명을 선정한다. 제관은 매일 목욕재계를 해서 몸을 깨끗이 유지한다. 예전에는 중평 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가면서 목욕재계를 했는데, 지금은 복개되어 없어졌으므로 집에서 하고 있다.
예전에는 제 지내기 일주일 전부터 제관을 비롯한 모든 동민들이 몸속에 있는 이조차 잡지 않을 만큼 엄한 금기를 지켰다고 하는데, 지금은 단지 제관만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여전히 제를 잘못 지내면 제관이 해를 입는다고 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제를 사흘 앞두고 유사는 산제당과 그 옆의 박 샘과 자신의 집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도 놓는다. 황토는 대문 양쪽에 각기 세 무더기씩 모두 여섯 무더기를 피운다. 박 샘은 먼저 물을 품고 청소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두면 사흘간은 제관 이외의 다른 사람은 사용하지 못하다. 주민들은 미리 사흘간 사용할 물을 떠다 놓는다.
만약 산신제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생기면 제일을 일주일쯤 연기하였으나 도시화되면서 일일이 부정을 가릴 수 없어 초상이나 출산이 생겨도 제일을 변경하지 않고 있다.
제비는 각 가정마다 쌀을 한 되나 두 되를 내는 것으로 제비를 하였으나 지금은 기금으로 충당한다. 기금은 약 20년 전에 거두었던 것으로 산제당을 보수하고 남겨 놓은 것이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실과, 명태포, 밥, 떡(흰무리, 세 되 세흡 분량), 탕, 술 따위를 올린다. 유사가 당일 아침 시장에 가서 정갈한 것으로 사서 쓴다. 물건을 사면서 값을 깎거나 흥정을 하지 않으며 부정한 것을 보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물은 유사 집에서 모두 마련해서 산제당으로 옮긴다. 예전에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돼지는 깨끗하고 연고가 없는 집의 것을 구입하며, 혹여 부정이 탈까하여 당일에 몰고 와서 산 제당 옆에서 직접 잡는다. 이 때 제당의 문은 열지 않고 칼로 목을 찌른 후 피를 받아내고 이어 다시 유사 집으로 옮긴다.
제관 일행은 도포에 유관을 쓴다. 마을 사람들이 참관을 한 가운데 제의를 진행한다. 제의 절차는 일반 가정의 제사와 비슷하다. 제물을 진설하고 분향하여 강신한 다음 재배하고 초헌, 아헌, 종헌을 하고 삼베를 올린다. 초헌을 하고 제관 일행이 재배한 다음 독촉과 소지를 올린다.
축문은 본래 한자로 쓰여 진 것이었는데, 한자를 읽은 줄 아는 사람이 줄어 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여 1970년대 후반에 새로 작성하여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대략 산신의 보호에 감사드리고 동민들은 물론 축생에 이르기까지 무사와 행운, 소원성취를 비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1987년에 사용하였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축문의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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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축문은 1978년에 사용했던 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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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는 산신소지를 먼저 올리고, 이어 호당 한 장씩 소지를 올려주었다. 중년에 호당 올려주던 소지를 반별 소지로 바꾸었다. 그러나 유향계가 결성된 이후로는 유향계 회원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런 후 동사무소, 파출소, 농협, 마을금고 등의 기관이나 단체, 영업장의 소지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제를 마치고 난 후에는 그 이튿날 유사 집에 모여 음복을 하였으나 근래에는 당일 저녁에 식당을 정해서 식사를 하고 있다.
② 유천동 거리제
이전에는 정월 열 나흗날에 거리제를 지냈으나 한동안 폐지하였다가 1997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거리제는 유천동과 태평동의 경계에 있던 선돌형 장승에서 지냈다. 시내 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교통이 번잡하여 제를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승은 유천 2동 대우장 사거리에 있었는데, 이곳은 태평동(하평)과 중평 사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상돌’ 혹은 ‘선돌’이라고 명명하였다. 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사흘 전에 미리 왼새끼에 길지를 꽂아 둘러놓는다. 현재는 유천 2동 동사무소로 사용될 예정 건물 앞에 놓여져 있으며, 그곳에서 1997년도에는 제를 지냈다.
거리제를 지내려면 먼저 제를 주관할 제관을 낸다. 산신제 제관이 겸임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제관을 선출해야 했다. 그가 사흘 전에 선돌에 금줄을 꼬아다가 둘 러 놓는다. 이 때 황토는 놓지 않는다. 제비는 걸립을 하여 마련했는데, 가가호호를 돌면서 지신을 밟아준다. 이를 ‘샘고사’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여 비용이 마련되면 유사가 제물을 구입한다. 다른 제물은 산신제와 동일하나 돼지머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당일 어두워지면 유사와 더불어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울리면서 제장으로 나간다. 선돌 앞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제물을 진설한 후 제를 진행한다. 술을 올리고 재배한 후 이어 축을 읽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는 호당 한 장씩 올려 주었으나 해방 후로는 반별로 올렸다. 이름을 호명하며 가정이 평안하고 질병에 걸리지 말기를 축원해준다. 이렇게 하여 제를 마친 후에는 그 자리에서 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한바탕 풍물을 울리면 논다.
<대전광역시 중구, 1998, pp.931~934./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4. pp.67~70./유명준(남 64세 1997년 현재, T.584-2059, 6대째 거주)/권영운(남 84세 1997년 현재, 유향계 회원으로 초기 유향계원의 사진을 보관하고 있음, T.532-4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