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권영호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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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권영호는 유회당(有懷堂)의 5세손으로 부친 대전(大銓)의 아들로 헌종 5년(1839)에 출생하여 문학명세(文學名世)로써 진사(進士)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학문을 일념으로 좋아하였고, 심성이 견고하고 확실하였다.
일찍이 서울에서 벗들과 사귀면서 고항지지(高亢支志)를 견지(堅持)하였으며, 항상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비패지행(鄙悖之行)은 하지 않았다.

조상을 봉행함에는 지성으로 하였고, 형제들과 우애는 돈독하고 착실하였으며, 물정(物情)에 소원하였고, 담담하게 자족하였다.
시(詩)와 사(史)를 몹시 좋아하여 시를 읊고, 스스로 고전을 모방하여 쫓았다. 1876년 가을 신(臣)에 대한 추천이 전후 다섯 차례가 있었으며, 1894년 봄에 처음 사마시험(司馬試驗)에 합격하였으나, 시사(時事)가 날로 변하고 국세(國勢)가 위험한 지경이 되어 다시는 성문안에 들어가지 않은지 13년이나 되었다.
강호(江湖)의 백수(白首)들과 더불어 기거하면서 교훈과 같이 살도록 하였으며, 향가(鄕歌)에서는 현가(絃歌)가 끊이질 않했고, 운사(韻士)를 맞이하여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국난을 비통해 하였다.
저서에는 『이운환필(怡雲煥筆)』 9권과 『약하간계(藥下簡戒)』 1권이 있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학문을 일념으로 좋아하였고, 심성이 견고하고 확실하였다.
일찍이 서울에서 벗들과 사귀면서 고항지지(高亢支志)를 견지(堅持)하였으며, 항상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비패지행(鄙悖之行)은 하지 않았다.

조상을 봉행함에는 지성으로 하였고, 형제들과 우애는 돈독하고 착실하였으며, 물정(物情)에 소원하였고, 담담하게 자족하였다.
시(詩)와 사(史)를 몹시 좋아하여 시를 읊고, 스스로 고전을 모방하여 쫓았다. 1876년 가을 신(臣)에 대한 추천이 전후 다섯 차례가 있었으며, 1894년 봄에 처음 사마시험(司馬試驗)에 합격하였으나, 시사(時事)가 날로 변하고 국세(國勢)가 위험한 지경이 되어 다시는 성문안에 들어가지 않은지 13년이나 되었다.
강호(江湖)의 백수(白首)들과 더불어 기거하면서 교훈과 같이 살도록 하였으며, 향가(鄕歌)에서는 현가(絃歌)가 끊이질 않했고, 운사(韻士)를 맞이하여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국난을 비통해 하였다.
저서에는 『이운환필(怡雲煥筆)』 9권과 『약하간계(藥下簡戒)』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