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지사 권용두선생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31
성민(聖玟)이고 호는 남곡(南谷)이다.
1912년 6월 15일(음력 5월 3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 무수리 299번지(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출생하였다 7세에 입학하여 소학(小學) 통감(通鑑)등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무수(無愁) 마을에서 세운 문흥강습소(文興講習所)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의 삼성초등학교의 전신인 대전 제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한 바 있다.
그 후 그는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25년에 대전 제일보통학교의 교사였던 권경득(權庚得)의 주도하에 <보아라 소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 순종(純宗)이 승하함에 동네 어른들이 상복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며 곡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린 나이에도 울분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이해 6월 10일 6·10만세운동에 가담하여 동년생 동창들과 함께 손으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대전역까지 만세 시위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6학년 학생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전 제일보통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그 후 1928년 4월 1일에 대전중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봄에는 수학여행으로 만주의 안동(安東)·봉천(奉天)·무순(無順)·여순(旅順)·대련(大連)등을 거쳐 대륙의 풍물을 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인 학생이 중심인 이 학교에 입학한 후 1929년 4월에는 대전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조선인 학생들의 모임인 '선우회(鮮友會)'에 입회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인이라는 긍지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전중학교 3학년 재학중에는 일본인 학생에게는 아부를 하면서 한국인 상급생에게는 인사조차도 하지 않는 한국인 2학년 학급생들에게 자존심을 지키라고 하면서 구타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학교로부터 징계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우회'의 회원으로 적극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전중학교 5학년 시절에는 항일구국을 목적으로 하는 '충남 전위동맹(忠南 前衛同盟)' 소속의 소년부 학생반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덕군 산내면 무수리에 농민야학원(農民夜學院)을 개설하고 문맹퇴치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노력한 바 있다.
또한 1932년 대전시 인동에 위치하고 있던 일본인이 경영하는 700여명 규모의 대전군시제사공장(大田郡是製絲工場)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학생반을 동원하여 수 천매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제사공장의 파업은 그 해 12월말까지 1개월여 계속되었으며, 이 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인은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전중학교에서 퇴학조치를 당함과 동시에 그 해 11월중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전경찰서에 연행되어 나까무라라는 일본인 고등계 주임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12월 전주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그 후 전주형무소 2동 36호실에 구속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31일에 예심이 끝나고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고문으로 인하여 왼쪽 귀의 고막이 터졌으며, 이후로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노무라(야촌)로부터의 고문 때문에 건성늑막염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상당 기간 결핵 요양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권용두는 고향에서 요양치료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하였을 뿐만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광복의 염원하는 도천행사(禱天行事)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출옥한 이후 1940년부터 대전의 근지에 위치하고 있는 명산인 보문산·식장산·서대산·대둔산·천호산 그리고 계룡산 등의 산천을 편력하면서 조국 광복과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도천행사를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가을부터 식장산에서 지헌영·김영철·조보살·조태호 등과 함께 <조국광복 혈서 발원제(發願祭)>를 거행하는 것을 시작으로하여, 1942년 10월 30일 보문산 시루봉에서 <일본함대격침 기원제(祈願祭)>를 가행하여
일본함대의 전멸을 간절히 기구(祈求)한 바도 있으며, 1945년 7월 15일에는 지헌영·김형철·조보살·오요한·조태호 등과 함께 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이사리와 구완리 사이로 가는 보문산 줄기의 돌고개 위에서 <조국광복 예축제(豫祝祭)>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 예축제가 거행되던 당시에는 이사리에 일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용두는 이를 안중에 두지 않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하여 게양하고 돼지를 희생 제물로하여 이 행사를 가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1945년 8월 7일 조보살·오요한·조태호·박광상 등과 더불어 대전시 옥계동의 동그나무가 서있던 북쪽의 통묘에서 <일본제국의 타도제(打倒祭)>를 거행한바도 있다.
이와 같이 1년 3개월여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1934년 3월 31일 이후로 광복이 되던 1945년 8월에 이르기까지 <조국광복 혈서 발원제>, <일본함대 격침 기원제>, <조국광복 예축제>, <일본제국주의 타도제> 등을 거행하여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복이 된 이후에도 자진하여 '반공 청년단'에 입단하고, 반공청년단 충남지부의 학술겸 문화부장직을 수락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간행하였으며, 이 정신에 입각하여 충남 일원을 순회·강연하면서 승공이념(勝共理念)의 확대와 강화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8·15광복 이후에도 조국 통일의 성제(誠祭)인 도청행각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쓴 이러한 공적으로 인하여 1990년 8월 15일 제 45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남곡 권용두는 조국의 광복에 공헌이 많은 애국지사였을 뿐만아니라, 광복 이후에는 교육자로서 2세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서 1950년 6월에 이르기까지 호서민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0년 9월부터 1958년 12월까지는 호서중학교의교사로 재직하면서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유림회(儒林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효도교육에 진력한 바도 있었으며, 1985년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교육계에서 물러난 1958년 12월 이후에는 『호서신문(湖西新聞)』과 『중도일보(中都日報)』등 지방언론에 각종의 논설을 발표하여, 언론인으로서 이 지역의 초창기 언론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공헌한 바도 적지 않다고 하겠다.
어려서부터 우리 것 찾기와 우리의 전통문화의 계승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과 노력은 여러 권의 저서로 결실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빛은 동방으로부터』와『새로운 세계관』과『한국의 혜안(慧眼)』그리고 『윷놀이의 원리』,『효행록』,『법상종(法相宗)』등의 저술을 나가기도 하였다. 이처럼 권용두는 많은 저서를 통하여 서양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종교·사상을 여러 권의 저서로 발간한 저술가인 동시에 『새맑은 바람』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문인기도 하다. 실제로 '호서문학회'를 비롯하여 '차령시조회'와 '가람문학회' 등 여러 문학회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 시조시인으로서 이 지역의 문학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권용두는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고, 1992년 3월 30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그해 4월 1일에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12년 6월 15일(음력 5월 3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 무수리 299번지(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에서 출생하였다 7세에 입학하여 소학(小學) 통감(通鑑)등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무수(無愁) 마을에서 세운 문흥강습소(文興講習所)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의 삼성초등학교의 전신인 대전 제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한 바 있다.
그 후 그는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25년에 대전 제일보통학교의 교사였던 권경득(權庚得)의 주도하에 <보아라 소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 순종(純宗)이 승하함에 동네 어른들이 상복을 입고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며 곡을 하는 것을 보고는 어린 나이에도 울분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이해 6월 10일 6·10만세운동에 가담하여 동년생 동창들과 함께 손으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대전역까지 만세 시위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6학년 학생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전 제일보통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그 후 1928년 4월 1일에 대전중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 봄에는 수학여행으로 만주의 안동(安東)·봉천(奉天)·무순(無順)·여순(旅順)·대련(大連)등을 거쳐 대륙의 풍물을 보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인 학생이 중심인 이 학교에 입학한 후 1929년 4월에는 대전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조선인 학생들의 모임인 '선우회(鮮友會)'에 입회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는 항상 조선인이라는 긍지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대전중학교 3학년 재학중에는 일본인 학생에게는 아부를 하면서 한국인 상급생에게는 인사조차도 하지 않는 한국인 2학년 학급생들에게 자존심을 지키라고 하면서 구타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학교로부터 징계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우회'의 회원으로 적극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전중학교 5학년 시절에는 항일구국을 목적으로 하는 '충남 전위동맹(忠南 前衛同盟)' 소속의 소년부 학생반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덕군 산내면 무수리에 농민야학원(農民夜學院)을 개설하고 문맹퇴치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노력한 바 있다.
또한 1932년 대전시 인동에 위치하고 있던 일본인이 경영하는 700여명 규모의 대전군시제사공장(大田郡是製絲工場)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학생반을 동원하여 수 천매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제사공장의 파업은 그 해 12월말까지 1개월여 계속되었으며, 이 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인은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전중학교에서 퇴학조치를 당함과 동시에 그 해 11월중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전경찰서에 연행되어 나까무라라는 일본인 고등계 주임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12월 전주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그 후 전주형무소 2동 36호실에 구속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31일에 예심이 끝나고 전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고문으로 인하여 왼쪽 귀의 고막이 터졌으며, 이후로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노무라(야촌)로부터의 고문 때문에 건성늑막염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상당 기간 결핵 요양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권용두는 고향에서 요양치료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항일운동을 하였을 뿐만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광복의 염원하는 도천행사(禱天行事)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출옥한 이후 1940년부터 대전의 근지에 위치하고 있는 명산인 보문산·식장산·서대산·대둔산·천호산 그리고 계룡산 등의 산천을 편력하면서 조국 광복과 일본의 패망을 기원하는 도천행사를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가을부터 식장산에서 지헌영·김영철·조보살·조태호 등과 함께 <조국광복 혈서 발원제(發願祭)>를 거행하는 것을 시작으로하여, 1942년 10월 30일 보문산 시루봉에서 <일본함대격침 기원제(祈願祭)>를 가행하여
일본함대의 전멸을 간절히 기구(祈求)한 바도 있으며, 1945년 7월 15일에는 지헌영·김형철·조보살·오요한·조태호 등과 함께 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이사리와 구완리 사이로 가는 보문산 줄기의 돌고개 위에서 <조국광복 예축제(豫祝祭)>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이 예축제가 거행되던 당시에는 이사리에 일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용두는 이를 안중에 두지 않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하여 게양하고 돼지를 희생 제물로하여 이 행사를 가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1945년 8월 7일 조보살·오요한·조태호·박광상 등과 더불어 대전시 옥계동의 동그나무가 서있던 북쪽의 통묘에서 <일본제국의 타도제(打倒祭)>를 거행한바도 있다.
이와 같이 1년 3개월여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1934년 3월 31일 이후로 광복이 되던 1945년 8월에 이르기까지 <조국광복 혈서 발원제>, <일본함대 격침 기원제>, <조국광복 예축제>, <일본제국주의 타도제> 등을 거행하여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복이 된 이후에도 자진하여 '반공 청년단'에 입단하고, 반공청년단 충남지부의 학술겸 문화부장직을 수락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간행하였으며, 이 정신에 입각하여 충남 일원을 순회·강연하면서 승공이념(勝共理念)의 확대와 강화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8·15광복 이후에도 조국 통일의 성제(誠祭)인 도청행각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쓴 이러한 공적으로 인하여 1990년 8월 15일 제 45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남곡 권용두는 조국의 광복에 공헌이 많은 애국지사였을 뿐만아니라, 광복 이후에는 교육자로서 2세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서 1950년 6월에 이르기까지 호서민중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양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0년 9월부터 1958년 12월까지는 호서중학교의교사로 재직하면서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유림회(儒林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효도교육에 진력한 바도 있었으며, 1985년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교육계에서 물러난 1958년 12월 이후에는 『호서신문(湖西新聞)』과 『중도일보(中都日報)』등 지방언론에 각종의 논설을 발표하여, 언론인으로서 이 지역의 초창기 언론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공헌한 바도 적지 않다고 하겠다.
어려서부터 우리 것 찾기와 우리의 전통문화의 계승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과 노력은 여러 권의 저서로 결실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빛은 동방으로부터』와『새로운 세계관』과『한국의 혜안(慧眼)』그리고 『윷놀이의 원리』,『효행록』,『법상종(法相宗)』등의 저술을 나가기도 하였다. 이처럼 권용두는 많은 저서를 통하여 서양문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종교·사상을 여러 권의 저서로 발간한 저술가인 동시에 『새맑은 바람』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문인기도 하다. 실제로 '호서문학회'를 비롯하여 '차령시조회'와 '가람문학회' 등 여러 문학회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 시조시인으로서 이 지역의 문학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권용두는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고, 1992년 3월 30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그해 4월 1일에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