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강진형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7
조회
24
호는 서암(瑞岩)이며 태영(泰永)의 아들로 1909년 5월 21일 예산군 봉산면 금티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공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하였고, 졸업 후 교육계에 투신하여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약13년 동안 숭덕중학, 정신여고 및 경복고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1945년에서 1952년까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학생과장직을 맡았으며, 광복 후 극도로 혼란했던 대학사회의 질서회복과 면학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고, 도서관장직을 맡아 교수와 학생들의 학술활동을 지원하는데 진력하였다.
그 사이 1949년에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1952년, 6·25전쟁의 전화 속에서 도립 충남대학교가 출범하게 되었을 때 당시 충남지사와 대전의 많은 유지들의 권유에 따라 농과대학의 창설 책임을 맡았다. 1962년 2월까지 약 10년 동안 농과대학장을 역임하면서 농과대학의 발전을 이룩하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그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1964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농학박사학위도 받았다. 1963년 3월부터 1967년 12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1968년 5월부터 1970년 4월까지 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충남대학교의 초창기 역사를 창조한 주역으로서 크고 작은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도립 충남대학교 6·25전쟁 중에 도민 매호당 보리 한말, 가마니 한장, 그리고 학생 한사람당 연필 한자루씩 거출한 재원을 기금으로 발족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충남대학교는 전쟁 중의 비상시국에 거의 빈손으로 대학설립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 교육을 시작한 것과 같았으며 충남도 당국의 제정형편도 빈약하기 짝이 없어 시설자금을 지원해 줄만한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개교와 동시에 학장이 직접 나서서 교지(校地)와 교사(校舍)문제를 해결하고 교수진도 확보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교지 선정을 위하여 대전시 일원을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고, 1954년 9월경 마침내 문화동 일대를교지와 연습림으로 확보하고, 농과대학 실험동을 창건하여 농과대학의 요람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다른 농업연구기관의 연구진, 외국에서 공부한 우수한 인재들, 전국 각지의 각급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수한 교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간청하여 초빙함으로써 농과대학의 교수진을 확보하였다.
1960년에서 1963년에 걸쳐 군사정부의 대학정비정책에 따라 도립 충북대학교가 통합, 국립 충청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충남대학교 농과대학은 충북대학교로 이전되는 운명에 처했다.
이때 그는 문교부와 최고회의 그리고 도움이 될만한 모든 기관과 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충남대학교 부활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주장하고 이해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1년만에 국립 충남대학교를 새로 탄생시키고, 그 후 반년만에 농과대학의 모든 학과를 부활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63년 3월부터 1967년 12월까지 4·19와5·16이 휩쓸고 지나간 시련의 대학 전환기에 총장을 역임, 흐트러진 대하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창의력과 개척정신과 지능연마"라는 세가지를 목표로 삼고, 이 기간에 도서관의 건립과 종합운동장의 개설, 공과대학 이전 법경대학 증설, 의과대학 신설, 종합연구고의 착공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20여년간을 오로지 충남대학교의 창설과 발전을 위하여 살았다. 또한 한평생을 교육자로서 후진양성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성품이 고결하고 청렴결백하여 참다운 교육자 상을 보여줌으로써 교육공로상, 충청남도 문화상, 황조소성훈장 및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여하였다.
정년을 1년도 남기지 않은 1973년 9월 13일 타계하여 산내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장희 여사와 3남 장남 명희(미국 거주, 사업), 차남 대희(미국 거주, 의사), 삼남 창희(국회의원)와 3녀(미국거주)가 있다.
[이미지 출처 : 충남대학교]
https://plus.cnu.ac.kr/html/kr/
1945년에서 1952년까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학생과장직을 맡았으며, 광복 후 극도로 혼란했던 대학사회의 질서회복과 면학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고, 도서관장직을 맡아 교수와 학생들의 학술활동을 지원하는데 진력하였다.
그 사이 1949년에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구생활을 하였다.
1952년, 6·25전쟁의 전화 속에서 도립 충남대학교가 출범하게 되었을 때 당시 충남지사와 대전의 많은 유지들의 권유에 따라 농과대학의 창설 책임을 맡았다. 1962년 2월까지 약 10년 동안 농과대학장을 역임하면서 농과대학의 발전을 이룩하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그와 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1964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농학박사학위도 받았다. 1963년 3월부터 1967년 12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1968년 5월부터 1970년 4월까지 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충남대학교의 초창기 역사를 창조한 주역으로서 크고 작은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도립 충남대학교 6·25전쟁 중에 도민 매호당 보리 한말, 가마니 한장, 그리고 학생 한사람당 연필 한자루씩 거출한 재원을 기금으로 발족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충남대학교는 전쟁 중의 비상시국에 거의 빈손으로 대학설립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 교육을 시작한 것과 같았으며 충남도 당국의 제정형편도 빈약하기 짝이 없어 시설자금을 지원해 줄만한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개교와 동시에 학장이 직접 나서서 교지(校地)와 교사(校舍)문제를 해결하고 교수진도 확보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교지 선정을 위하여 대전시 일원을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고, 1954년 9월경 마침내 문화동 일대를교지와 연습림으로 확보하고, 농과대학 실험동을 창건하여 농과대학의 요람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다른 농업연구기관의 연구진, 외국에서 공부한 우수한 인재들, 전국 각지의 각급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수한 교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간청하여 초빙함으로써 농과대학의 교수진을 확보하였다.
1960년에서 1963년에 걸쳐 군사정부의 대학정비정책에 따라 도립 충북대학교가 통합, 국립 충청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충남대학교 농과대학은 충북대학교로 이전되는 운명에 처했다.
이때 그는 문교부와 최고회의 그리고 도움이 될만한 모든 기관과 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충남대학교 부활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주장하고 이해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며 1년만에 국립 충남대학교를 새로 탄생시키고, 그 후 반년만에 농과대학의 모든 학과를 부활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63년 3월부터 1967년 12월까지 4·19와5·16이 휩쓸고 지나간 시련의 대학 전환기에 총장을 역임, 흐트러진 대하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창의력과 개척정신과 지능연마"라는 세가지를 목표로 삼고, 이 기간에 도서관의 건립과 종합운동장의 개설, 공과대학 이전 법경대학 증설, 의과대학 신설, 종합연구고의 착공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20여년간을 오로지 충남대학교의 창설과 발전을 위하여 살았다. 또한 한평생을 교육자로서 후진양성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성품이 고결하고 청렴결백하여 참다운 교육자 상을 보여줌으로써 교육공로상, 충청남도 문화상, 황조소성훈장 및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여하였다.
정년을 1년도 남기지 않은 1973년 9월 13일 타계하여 산내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장희 여사와 3남 장남 명희(미국 거주, 사업), 차남 대희(미국 거주, 의사), 삼남 창희(국회의원)와 3녀(미국거주)가 있다.
[이미지 출처 : 충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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