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달동(木達洞) 남달미 산신제. 장승제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105
목달동(木達洞) 남달미 산신제. 장승제
(1) 조사지 개관
목달동은 북쪽으로 구완동과 경계를 이루는 구라산(높이 249m)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금동, 서쪽으로는 침산동, 동북으로는 무수동과 경계하고 있다.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 목달촌이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남달미를 비롯하여 안골, 송절(松寺), 낙동(樂洞), 역골 등 자연마을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산내면 목 달리가 되었다. 1935년 대전부 설치로 대덕군 산내면 목달리로 되었다가,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중구 목달동으로 편입하였다. 현재 행정동은 산서동이다.
목달동의 자연마을은 낙동(樂洞, 매화동), 남달미(목달리(木達里)), 새터, 송절(송사(松寺)), 수박거리, 안골(큰골, 내곡 內谷), 내동(內洞)), 역골(떡공, 기역사, 역동), 외수모팅이, 음지뜸, 충적골(퉁적골) 등이 있다. 낙동은 송절 북쪽 방산 서쪽, 무수동 접경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부터 매화꽃이 떨어진다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다. 그러나 낙동(落洞)이 아니라 낙동(落洞)으로 표기한다. 남 달미는 구라골 남쪽 남달미 북쪽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나무다리, 목다리, 목달, 목달촌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은 안동 권씨의 동족마을이다. 새 터는 산서초등학교 동쪽, 안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송절은 역골 서북쪽, 산서초등학교 북쪽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부터 전주 이씨의 동족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소나무 숲속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송절이라 한다. 수박거리는 수박골 내의 남달미 마을 동쪽 둥구나무 정자가 있는 길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안골은 산서초등학교에서 동북쪽에 위치하며, 송절골 동쪽으로 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역골은 남달미 북쪽 산서초등학교에서 내를 건너, 산서동 위쪽의 정생동으로 가는 산 아래 고개 길에 위치한 마을임, 무저리(물참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뜸은 만달미 마을 남쪽산 아래에 두세 채 가옥이 있는 마을이다. 충적골(퉁적골)은 산서초등학교 서쪽 내 건너에 있는 솔모랭이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있는 골짜기이다.
(2) 제의 실태
① 남달미 산신제. 장승제
목달동에는 예전에 역골에 있었던 선돌형 장승에서 마을 공동으로 거리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데, 장승은 자연석으로, 마을 입구의 하천변에 6개가 군집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모습이 아니라 부락의 사방에 각각 세워져 있던 것을 마을 회의를 통해서 한곳에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이은창, ?금강유역의 부락제연구?, ?장엄지헌영선생화갑기념논총?, 1971. p.1058이 실려음) 마을에 신작로를 뚫으며 오직 한 개의 장승만 남았었는데, 이것조차 길을 넗 히 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제의 역시 오래 전에 소멸되었기에 그 내용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산신제를 중심으로 제의 실태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남달미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는데, 1997년부터 날짜를 뒤로 미루어 열 사흗날이나 열 나흗날 양일중에 하루를 선택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이는 초순에는 외지 사람들이 산에 성묘하러 다니거나,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오기 때문에 혹 부정을 탈까하여 날짜를 변경한 것이다.
마을의 뒤편으로 석태산을 오르는 길옆에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산신제를 지내는 제장이다. 이곳을 ‘산신당’이라고 한다. 바위의 아래는 제단처럼 평평한 부분이 있어 여기에 제물을 차린다.
산제샘은 마을에서 산신당으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 있는 넓은 밭의 끝 산밑에 있다. 이 샘물을 길어다 목욕재계를 하고 술을 담그고 제물을 준비한다. 따라서 제를 지내기 열흘 전쯤에 일찍이 샘을 품어내고 청소를 한다. 산 제샘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실제 겨울에도 이 샘에는 개구리가 놀고 있다.
예전에는 반계를 하여 제관을 선출하였지만 최근 칠팔년간은 송용준 씨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10여 가구 남짓한 마을이라 인구도 적은데다 제관을 맡을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송용준 씨도 이제는 제관을 맡기가 점점 힘들다고 토로한다. 목욕을 하고, 술을 담그고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샘에서 물지게로 몇 번씩 물을 져 나르는 것도 힘들고 , 산 제당에 오르내리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와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어려움을 토로한다. “당분간은 내가 계속 하지만 산신제 때만 되면 고민이여.” “설 돌아오면 아주 큰 걱정이여” “고민이지 이기 참말로, 눈이나 많이 와서 쌓이고 하면 그냥 전부 하루나 나서 그걸 다 쓸어야 한단 말이여. 그걸 다 쓸어야 하지. 청소해야지, 질 닦 어 놓아야지, 올라갈 때 전부 칼퀴 지고 가 솔잎을 긁어내야 하는디 솔잎에 눈이 쌓이면 미끄러워, 솔가루 이렇게 쌓인게 미끌 어지면 그 제물 다 버리 잖어. 그런께 전부 청소를 하고 길을 닦고 해서 그러께 지내기 전날은 한 나절 가서 그걸 닦어야 혀. 청소를 하고 전부 해야 혀”등 이다.
예전에는 산제를 지낸 다음날 음복을 하면서 반계(반회)를 하며, 이때 깨끗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했다. 일 년 전에 다음 해의 제관을 뽑았다. 제관은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선정하며 집안에 젊은 여자가 있으면 혹 달거리를 할 수 있고 해서 못한다. 그래서 연령이 오육십대로 부정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제관을 선정한다.
제를 지내기 전날 산 제당을 빙 둘러 금줄을 치고 나무를 해 놓고 길을 닦는다. 제관이 지켜야 할 금기에 대하여 송용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려운 것이 삼 일간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해. 술 담배 안하고, 배깥 출입 금하고, 삼일 전에 대문에 금줄치고 황토피고, 비린 것 먹지 않고, 생선이나 비린 것은 먹지 않아야 혀.”
금줄은 왼새끼를 군데군데 짚이 삐죽이 나오게 꼬며, 소지종이를 홀수로 끼운다. 금줄은 깔끔하게 꼬지를 않고 거칠게 하며, 반듯하거나 매끈하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제를 지내면 다음날 음복을 하는데 드는 비용은 산제기금에서 충당한다. 기금으로 쌀이 네 가마있는데, 이 쌀을 집집마다 형편 닿는 데로 먹고 가을에 1할 5부의 이자를 돈으로 내어 산제 비용으로 쓴다. 이자는 약 9만원이 걷힌다. 자발적이며 의무적으로 쌀을 가져다 먹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산제를 지낼 때 집집마다 쌀을 한 되나 두 되씩 형편대로 걷어 지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약 1년 전쯤에 산제기금을 조성했다고 한다. 각 집의 형편에 따라서 한 말이든 닷 말이든 낸 것으로 원금은 그대로 두고 걷힌 이자를 산제비용으로 쓰고 있다.
시장은 제주가 반장하고 같이 가며 값은 달라는 대로 다준다. 돼지머리, 소고기 한근, 명태 두 마리(눈알 빠지지 않은 것), 소지종이, 삼색실과, 떡쌀, 술, 소금 한 되를 제수로 사고, 산제 지낸 이튿날 반회할 때 먹을 찌개 거리로 두부 몇 모, 동태 몇 마리를 산다. 산제에 쓰일 명태는 눈이 빠진 것은 안 된다.
제에 쓰일 술은 일주일 전에 산 제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목욕재계한 뒤 담는다. 술은 누룩 한 말, 쌀 한 말로 담는다. 제를 지내기 전날 역시 길어온 물로 목욕을 하고 떡쌀을 도구통에서 빻아 놓는다. 떡은 백설기로 세 되 세 흡 분량으로 한다. 소고기는 한 근을 날 것으로 산적을 하고, 돼지 머리도 삶지 않고 생물로 사용한다.
제일 아침에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부부가 목욕을 하고 제물을 장만한다. 밥을 세 되 세 흡하고, 나물 따위를 준비한다.
당일 저녁 여덟 시쯤이 되면 제관 부부가 제물을 이고 지고 산신당으로 올라간다. 도착하면 제장 앞쪽에 볼록하게 나온 곳에 화톳불을 피운다. 이 불은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 않고 그대로 탄다고 한다.
불을 피워 놓고 제물을 진설한다. 뒷줄의 좌측에 떡시루, 우측에 밥을 놓고, 가운데는 돼지머리와 쇠머리 산적을 놓는다. 삼색실과는 맨 앞줄에 왼쪽부터 대추, 곶감, 밤의 순서로 놓는다. 떡시루의 양쪽 귀에는 명태를 한 마리씩 꽂는다. 돼지머리 옆에는 소금한 종지를 놓는다.
촛불을 켜고 분향을 한다. 향은 향나무 깎은 것을 쓴다. 분향 후 재배하고 술잔을 올린다. 잔은 양쪽에 한 잔씩 올리는데, 산신령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배하고 수저를 수저 그릇에 내리고 독축을 한다. 이어서 소지를 올리고 재배를 하면 산제는 끝난다.

소지는 가장 먼저 산신님에게 올리고, 만동소지, 호주소지, 가축소지 순서로 올린다. 만동소지는 남달미 뿐만 아니라 목달동 각 마을의 대동소지를 다 올려준다. 남달리 주민은 호주 소지를 올리며, 각 호주의 이름을 부르고 한 해의 안녕과 축복을 빌어준다. 현재 시내에 거주하면서 남달미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소지를 올려준다. 산제를 잡숫고 나면 그 이튿날 아침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여 음복을 한다. 제물을 나누어 먹고 술 한잔하고, 반계(반회)도 열면서 하루를 보낸다. 산 제떡은 재수가 있다고 한다.
반계(반회)를 통해 산제에 든 비용을 정산하며, 모든 반 관계의 일을 의논한다.
<대전광역시 중구, 1998. 916~919./국립민속박물관, 1991. pp.256~257./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61~64.>ㅅ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장승
(1) 조사지 개관
목달동은 북쪽으로 구완동과 경계를 이루는 구라산(높이 249m)의 남서쪽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금동, 서쪽으로는 침산동, 동북으로는 무수동과 경계하고 있다.
백제 때 우술군(雨述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 목달촌이었다. 고종 32년(1895)에는 회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남달미를 비롯하여 안골, 송절(松寺), 낙동(樂洞), 역골 등 자연마을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전군 산내면 목 달리가 되었다. 1935년 대전부 설치로 대덕군 산내면 목달리로 되었다가,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중구 목달동으로 편입하였다. 현재 행정동은 산서동이다.
목달동의 자연마을은 낙동(樂洞, 매화동), 남달미(목달리(木達里)), 새터, 송절(송사(松寺)), 수박거리, 안골(큰골, 내곡 內谷), 내동(內洞)), 역골(떡공, 기역사, 역동), 외수모팅이, 음지뜸, 충적골(퉁적골) 등이 있다. 낙동은 송절 북쪽 방산 서쪽, 무수동 접경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부터 매화꽃이 떨어진다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마을 이름이다. 그러나 낙동(落洞)이 아니라 낙동(落洞)으로 표기한다. 남 달미는 구라골 남쪽 남달미 북쪽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나무다리, 목다리, 목달, 목달촌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마을은 안동 권씨의 동족마을이다. 새 터는 산서초등학교 동쪽, 안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송절은 역골 서북쪽, 산서초등학교 북쪽 산 밑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부터 전주 이씨의 동족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소나무 숲속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송절이라 한다. 수박거리는 수박골 내의 남달미 마을 동쪽 둥구나무 정자가 있는 길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안골은 산서초등학교에서 동북쪽에 위치하며, 송절골 동쪽으로 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산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역골은 남달미 북쪽 산서초등학교에서 내를 건너, 산서동 위쪽의 정생동으로 가는 산 아래 고개 길에 위치한 마을임, 무저리(물참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음지뜸은 만달미 마을 남쪽산 아래에 두세 채 가옥이 있는 마을이다. 충적골(퉁적골)은 산서초등학교 서쪽 내 건너에 있는 솔모랭이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있는 골짜기이다.
(2) 제의 실태
① 남달미 산신제. 장승제
목달동에는 예전에 역골에 있었던 선돌형 장승에서 마을 공동으로 거리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데, 장승은 자연석으로, 마을 입구의 하천변에 6개가 군집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모습이 아니라 부락의 사방에 각각 세워져 있던 것을 마을 회의를 통해서 한곳에 모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이은창, ?금강유역의 부락제연구?, ?장엄지헌영선생화갑기념논총?, 1971. p.1058이 실려음) 마을에 신작로를 뚫으며 오직 한 개의 장승만 남았었는데, 이것조차 길을 넗 히 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제의 역시 오래 전에 소멸되었기에 그 내용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산신제를 중심으로 제의 실태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남달미에서는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해마다 산신제를 지냈는데, 1997년부터 날짜를 뒤로 미루어 열 사흗날이나 열 나흗날 양일중에 하루를 선택하여 제를 지내고 있다. 이는 초순에는 외지 사람들이 산에 성묘하러 다니거나,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오기 때문에 혹 부정을 탈까하여 날짜를 변경한 것이다.
마을의 뒤편으로 석태산을 오르는 길옆에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산신제를 지내는 제장이다. 이곳을 ‘산신당’이라고 한다. 바위의 아래는 제단처럼 평평한 부분이 있어 여기에 제물을 차린다.
산제샘은 마을에서 산신당으로 향하는 길의 초입에 있는 넓은 밭의 끝 산밑에 있다. 이 샘물을 길어다 목욕재계를 하고 술을 담그고 제물을 준비한다. 따라서 제를 지내기 열흘 전쯤에 일찍이 샘을 품어내고 청소를 한다. 산 제샘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실제 겨울에도 이 샘에는 개구리가 놀고 있다.
예전에는 반계를 하여 제관을 선출하였지만 최근 칠팔년간은 송용준 씨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10여 가구 남짓한 마을이라 인구도 적은데다 제관을 맡을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송용준 씨도 이제는 제관을 맡기가 점점 힘들다고 토로한다. 목욕을 하고, 술을 담그고 제물을 장만하기 위해서 멀리 떨어진 샘에서 물지게로 몇 번씩 물을 져 나르는 것도 힘들고 , 산 제당에 오르내리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와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어려움을 토로한다. “당분간은 내가 계속 하지만 산신제 때만 되면 고민이여.” “설 돌아오면 아주 큰 걱정이여” “고민이지 이기 참말로, 눈이나 많이 와서 쌓이고 하면 그냥 전부 하루나 나서 그걸 다 쓸어야 한단 말이여. 그걸 다 쓸어야 하지. 청소해야지, 질 닦 어 놓아야지, 올라갈 때 전부 칼퀴 지고 가 솔잎을 긁어내야 하는디 솔잎에 눈이 쌓이면 미끄러워, 솔가루 이렇게 쌓인게 미끌 어지면 그 제물 다 버리 잖어. 그런께 전부 청소를 하고 길을 닦고 해서 그러께 지내기 전날은 한 나절 가서 그걸 닦어야 혀. 청소를 하고 전부 해야 혀”등 이다.
예전에는 산제를 지낸 다음날 음복을 하면서 반계(반회)를 하며, 이때 깨끗한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했다. 일 년 전에 다음 해의 제관을 뽑았다. 제관은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선정하며 집안에 젊은 여자가 있으면 혹 달거리를 할 수 있고 해서 못한다. 그래서 연령이 오육십대로 부정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제관을 선정한다.
제를 지내기 전날 산 제당을 빙 둘러 금줄을 치고 나무를 해 놓고 길을 닦는다. 제관이 지켜야 할 금기에 대하여 송용준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려운 것이 삼 일간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해. 술 담배 안하고, 배깥 출입 금하고, 삼일 전에 대문에 금줄치고 황토피고, 비린 것 먹지 않고, 생선이나 비린 것은 먹지 않아야 혀.”
금줄은 왼새끼를 군데군데 짚이 삐죽이 나오게 꼬며, 소지종이를 홀수로 끼운다. 금줄은 깔끔하게 꼬지를 않고 거칠게 하며, 반듯하거나 매끈하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제를 지내면 다음날 음복을 하는데 드는 비용은 산제기금에서 충당한다. 기금으로 쌀이 네 가마있는데, 이 쌀을 집집마다 형편 닿는 데로 먹고 가을에 1할 5부의 이자를 돈으로 내어 산제 비용으로 쓴다. 이자는 약 9만원이 걷힌다. 자발적이며 의무적으로 쌀을 가져다 먹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산제를 지낼 때 집집마다 쌀을 한 되나 두 되씩 형편대로 걷어 지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약 1년 전쯤에 산제기금을 조성했다고 한다. 각 집의 형편에 따라서 한 말이든 닷 말이든 낸 것으로 원금은 그대로 두고 걷힌 이자를 산제비용으로 쓰고 있다.
시장은 제주가 반장하고 같이 가며 값은 달라는 대로 다준다. 돼지머리, 소고기 한근, 명태 두 마리(눈알 빠지지 않은 것), 소지종이, 삼색실과, 떡쌀, 술, 소금 한 되를 제수로 사고, 산제 지낸 이튿날 반회할 때 먹을 찌개 거리로 두부 몇 모, 동태 몇 마리를 산다. 산제에 쓰일 명태는 눈이 빠진 것은 안 된다.
제에 쓰일 술은 일주일 전에 산 제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목욕재계한 뒤 담는다. 술은 누룩 한 말, 쌀 한 말로 담는다. 제를 지내기 전날 역시 길어온 물로 목욕을 하고 떡쌀을 도구통에서 빻아 놓는다. 떡은 백설기로 세 되 세 흡 분량으로 한다. 소고기는 한 근을 날 것으로 산적을 하고, 돼지 머리도 삶지 않고 생물로 사용한다.
제일 아침에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부부가 목욕을 하고 제물을 장만한다. 밥을 세 되 세 흡하고, 나물 따위를 준비한다.
당일 저녁 여덟 시쯤이 되면 제관 부부가 제물을 이고 지고 산신당으로 올라간다. 도착하면 제장 앞쪽에 볼록하게 나온 곳에 화톳불을 피운다. 이 불은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 않고 그대로 탄다고 한다.
불을 피워 놓고 제물을 진설한다. 뒷줄의 좌측에 떡시루, 우측에 밥을 놓고, 가운데는 돼지머리와 쇠머리 산적을 놓는다. 삼색실과는 맨 앞줄에 왼쪽부터 대추, 곶감, 밤의 순서로 놓는다. 떡시루의 양쪽 귀에는 명태를 한 마리씩 꽂는다. 돼지머리 옆에는 소금한 종지를 놓는다.
촛불을 켜고 분향을 한다. 향은 향나무 깎은 것을 쓴다. 분향 후 재배하고 술잔을 올린다. 잔은 양쪽에 한 잔씩 올리는데, 산신령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배하고 수저를 수저 그릇에 내리고 독축을 한다. 이어서 소지를 올리고 재배를 하면 산제는 끝난다.

소지는 가장 먼저 산신님에게 올리고, 만동소지, 호주소지, 가축소지 순서로 올린다. 만동소지는 남달미 뿐만 아니라 목달동 각 마을의 대동소지를 다 올려준다. 남달리 주민은 호주 소지를 올리며, 각 호주의 이름을 부르고 한 해의 안녕과 축복을 빌어준다. 현재 시내에 거주하면서 남달미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소지를 올려준다. 산제를 잡숫고 나면 그 이튿날 아침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여 음복을 한다. 제물을 나누어 먹고 술 한잔하고, 반계(반회)도 열면서 하루를 보낸다. 산 제떡은 재수가 있다고 한다.
반계(반회)를 통해 산제에 든 비용을 정산하며, 모든 반 관계의 일을 의논한다.
<대전광역시 중구, 1998. 916~919./국립민속박물관, 1991. pp.256~257./대전직할시 향토사료관, 1993. pp.61~64.>ㅅ
[사진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장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