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계숭절사
작성자
대전중구문화원
작성일
2024-05-08
조회
27
안영동의 창명정이 마을에 있는 고풍스런 창계숭절사(滄溪嵩節祠)

1923년에 세워진 이 창계승절사(문화재 자료 제2호)는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충정공(忠貞公) 박팽년(朴彭年, 1417∼1456)과,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함께 복위운동을 도모했던 충정공(忠正公)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1456), 이 두 분의 위패 (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박팽년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7년(1434) 문과에 급제한 후 단종 2년(1453)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는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는 중 발각되어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심문 선생 역시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8년(1436)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함길도 절도사인 김종서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큰 공을 세웠으며 단종복위운

원래 정절서원(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박팽년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받들어 놨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이 헐려, 지금 있는 곳에 다시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기서 창계는 유등천을 달리 일컫는 말이다.

1923년에 세워진 이 창계승절사(문화재 자료 제2호)는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충정공(忠貞公) 박팽년(朴彭年, 1417∼1456)과,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함께 복위운동을 도모했던 충정공(忠正公)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1456), 이 두 분의 위패 (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박팽년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7년(1434) 문과에 급제한 후 단종 2년(1453)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는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는 중 발각되어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심문 선생 역시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8년(1436)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함길도 절도사인 김종서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큰 공을 세웠으며 단종복위운

원래 정절서원(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박팽년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받들어 놨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이 헐려, 지금 있는 곳에 다시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기서 창계는 유등천을 달리 일컫는 말이다.